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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혁명아 체 게바라/“유골 찾아라” 볼리비아 일대 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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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혁명아 체 게바라/“유골 찾아라” 볼리비아 일대 법석

입력
1995.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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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게릴라신화/카스트로와 쌍벽·각국돌며 전투중 28년전 피살/혁명엔 실패했지만 일부서 “빈민 영웅”으로 추앙/인간적면모 접근… 군부선 기념비철거등 “떨떠름”그의 게릴라운동은 실패와 죽음으로 끝났다. 그가 세계에 전파하려 했던 혁명은 좌절됐다. 그를 움직였던 이데올로기는 전세계에서 붕괴됐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28년이 지난 지금 그의 신화는 죽기를 거부하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전설의 게릴라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지금 볼리비아에서는 그의 유골찾기가 한창이다.

체 게바라일당 소탕작전에 참가했던 볼리비아의 두 퇴역장군이 최근 체 게바라가 살해 암장된 정확한 장소를 알고 있다고 밝힌뒤 정부차원에서 유해발굴에 나선 것이다. 볼리비아정부는 수도 라파즈에서 690 떨어진 발레그란데시에서 수색작업을 벌여 3구의 유해를 찾아냈으나 체 게바라의 것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체 게바라 유골찾기는 묻혀 있던 그의 신화를 부활시켰다. 부활한 신화는 과거의 신비적이고 영웅적인 것에서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면모가 덧붙여졌다.

그를 초라한 행색의 이방인에 불과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빈민의 영웅으로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다. 62세의 한 농부는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농민들에게 해 준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우리를 돕겠다고 했지만 도움을 받을 사람은 그 자신이었을 정도로 초라한 행색이었다』고 회고했다.

발레그란데 부시장인 헤르난 코르테즈씨는 이에 반해 『오래된 신문지에서 오려낸 체 게바라의 사진을 모셔놓고 예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유해발굴작업이 진행되던 지난 2주일동안 이 지역농민들은 「체 게바라는 살아 있다」라는 글을 나무로 만들어 거기에 불을 붙여놓기도 했다.

산체스 로자다 볼리비아 대통령은 『체 게바라의 유해가 발굴되면 가족들에게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발레그란데주민들은 체 게바라의 유해가 발굴되면 체 게바라기념관을 건립해 보존하겠다며 이에 반대하고 있다.

볼리비아군부는 체게바라신화가 되살아 나는것에 떨떠름해 하고 있다. 「공비」였던 체 게바라가 「영웅」으로 거듭날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인들은 인근마을의 학생들이 체 게바라기념비를 세우자 재빨리 그것을 철거했었다.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건축가의 맏아들로 태어난 체 게바라는 53년 부에노스 아이레스대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54년 과테말라를 여행하던중 토지를 빈농에게 분배하는 구츠만대통령의 토지개혁에 깊이 공감했다. 그러나 미국의 사주와 지원을 받은 용병들의 쿠데타로 구츠만정부가 무너지자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우연의 일치인지 과테말라에서도 지난10월 구츠만대통령이 망명 41년만에 유해로 귀국해 역사 바로잡기가 한창이다.

체 게바라는 59년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군을 이끌고 아바나로 입성하기까지 의사로서 전사로서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특히 그가 지휘한 산타 클라라 기지전투는 바티스타독재를 전복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그후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콩고·볼리비아 등 각국 혁명전투에 참가했다가 67년 10월 10일 볼리비아 정부군에 사살됐다.<권대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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