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는사랑 남기고 간 참인술 한평생/국내 첫 의보조합 「청십자」 설립/북에 두고온 부인 그리며 “수절”/집없이 관사서 노년보내 “무소유의 삶”/지병불구 말년까지 영세민진료 헌신 성탄절인 25일 영면한 장기려 박사는 평생 어렵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사랑의 인술과 복음을 펼쳐온 「한국의 슈바이처」였다. 45년동안 북에 두고온 아내와 가족을 잊지 못해 「수절」한 그의 간절한 재회 소망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지만 그가 이땅에 남긴 사랑은 한없이 넓고 깊다.
1909년 평북 용천군 양하면에서 태어난 장박사는 개성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32년 서울대의대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장박사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40년부터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와 평양도립병원장을 지낸 그는 전쟁이 난 50년 12월 부인 김봉숙(당시 39세)씨와 5남매를 남겨두고 차남 가용(60·서울대의대교수)씨만을 데리고 월남했다.
장박사는 51년부터 부산 영도구에 천막을 치고 복음병원(현 고신의료원)을 세워 전화속에 내버려진 헐벗은 이웃들을 무료로 치료했다. 6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 의료구호사업에 헌신했다. 지난해부터 당뇨병과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면서도 매일 상오 부산 청십자병원에서 하루 10여명의 영세민 환자들을 돌봐왔다.
장박사는 길에서 만난 거지에게 줄 돈이 없자 수표를 선뜻 건네주기도 했고 추운방에서 자취하는 제자에게 며느리가 해온 이불을 들려 보내기도 했다. 한번은 병원비가 없는 환자들을 그냥 퇴원시키는 그에게 직원들이 뭐라하자 환자에게 뒷문을 열어주며 도망치라고 했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춘원 이광수는 그를 『성인 아니면 바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그러나 자신은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한 사람이었다. 75년 정년퇴임 후에도 집한채가 없어 고신의료원이 병원옥상에 마련해준 20여평 관사에서 노년을 보냈다. 장박사의 삶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에 널리 알려져 79년에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부문)을 받았고 국민훈장동백장 부산시민상 국제라이온스인도상등을 수상했다.
장박사의 지난 45년은 모든 이산가족의 아픔이기도 했다. 그는 이산가족만남 신청이 있을 때마다 항시 제1번이었다. 재혼하라는 주위의 권유에 『우리의 사랑은 육체의 이별과 무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 위해 혼자 산다』고 말했다. 88년 미국에 있는 친지를 통해 부인과 5남매의 사진과 편지를 전해받는 간접상봉만을 했을 뿐 끝내 재회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장박사는 『비문에 주를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는 소박한 유언을 남겼다. 한편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안병영 교육부장관등 각계인사가 조문했고 선우중호 서울대총장직대, 백낙조 인제학원이사장등이 조화를 보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권혁범·부산=김종흥 기자>권혁범·부산=김종흥>
◎김 대통령 빈소 조의
김영삼 대통령은 25일 낮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고 장기려 박사 빈소에 김광일 비서실장을 보내 문상하고 유족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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