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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박사의 의와 한(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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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박사의 의와 한(사설)

입력
1995.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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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실향민에게 이북에 두고 온 고향과 가족은 언제나 애끓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 실향민의 상징이라고도 할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가 통일을 못 본 채 25일 타계했다. 그의 부음은, 예년보다 추위가 심할 것이라는 올해 겨울, 북한주민이 지난 여름의 홍수피해로 먹을 것이 없어 고통받는다는 보도와 함께 어수선한 세모를 맞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한다. 평북 용천 태생으로 경성의전을 나온 장박사는 평양의학대학 외과교수로 재직하다가 6·25를 맞았다. 50년 12월 평양 대폭격의 와중에서 둘째아들만 데리고 월남했다. 나머지 5남매는 부인에게 맡겨 둔 채였다. 실향민 대부분이 그랬다. 『곧 돌아와 만날 수 있겠지』라는 말 한마디만이 서로의 믿음이었다. 그후 45년, 그들은 청·장년을 지나 노인이 되고 병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재회의 꿈을 버릴 수 없었다.

 장박사가 그랬다. 지난해 김일성이 죽기 직전 실현될 뻔했던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산가족 만남의 길이 마침내 열리는가 싶었다. 그러나 김의 사망으로 그 꿈은 무산되고 재회의 기약은 다시 막막하게 멀어져 갔다. 80세를 훨씬 넘어 당뇨와 중풍이 겹친 그의 가슴이 낙담으로 내려 앉았을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지난 88년 미국에 사는 친지를 통해 아내와 5남매의 사진과 편지를 전해 받은 후 그리움은 더욱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말 그대로 이웃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한평생을 살았다. 피란수도 부산에 정착한 후 암절제수술에 맨처음 성공한 의료인으로서,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한 선각자로서, 늘 가난한자와 병든자의 괴로움을 먼저 살피고 도우려 한 우리시대의 의인으로서 살았다. 복음병원과 청십자병원을 만들고 무료진료를 통해 그늘진 곳에 인술을 베푼 공로로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남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현실과 환경을 탓하며 인술의 사명을 부의 축적과 맞바꾸는 세태 속에서 그의 의롭고 청빈한 삶은 의료인의 명예를 지켜준 우리사회의 한 도덕적 지표라 할만했다.

 그의 이런 교훈적인 삶을 가능하게 한것은 북의 가족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남쪽에 내려오고 나서도 죽기까지 재혼하지 않고 북의 아내를 그리워했다.

 그는 얼마전 한국일보와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에는 북에 있는 다섯 남매 생각이 한층 간절하다. 아내가 보고싶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사회의 한 도덕적 지주를 잃었다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의 꿈이 실현되지 못한 조국의 현실이 안타깝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의로운 삶이 이같은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는 밑거름이 돼야 할 까닭도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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