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응했지만 진술거부 불변”/최씨 “또 오셨네요” 가벼운 인사○…16일 하오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한 2차방문조사를 한 서울지검 김상희 주임검사등 12·12특별수사본부팀은 방문 1시간20여분 뒤인 하오 4시46분께 최씨 집을 나와 조사내용을 묻는 보도진의 질문에 시종 굳은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만 하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김검사는 『최전대통령은 검찰조사에는 응했으나 국민과 국익을 위해 아직은 밝힐 단계가 아니라는 종전 입장을 고수했다』고 간단히 말하고 황급히 승용차에 올랐다. 이날 검찰은 최전대통령에게 12·12에 대한 질문을 조목조목 물었으나 최전대통령이 『답변할 수 없다』고 진술하자 이를 그대로 진술조서에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조사단과 함께 밖으로 나온 최전대통령의 법정대리인 이기창 변호사는 보도진이 김검사의 답변을 듣기 위해 몰려가자 『발표할 내용이 있다』며 보도진을 불러모았다. 이변호사와 최흥순 비서관은 A4용지 3장 분량의 「국민에게 드리는 글」 복사본을 70여명의 보도진에게 나눠준 뒤 취재 카메라가 집중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변호사는 최전대통령을 대신해 서교동 자택 정문앞에서 7분동안 굳은 표정으로 성명을 읽어내려가다 마지막에 『대독』이란 말을 큰 소리로 외쳤다.
이변호사는 성명을 읽고 난 뒤 성명작성경위와 대책등을 묻는 보도진의 질문공세에 『오해의 소지가 있고 최대통령의 권위에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어 답변할 수 없다』며 『자세한 내용은 검찰이 공개할 것』이라고만 말했다. 한 비서관은 『성명을 봤으면 다 알지 않느냐』라면서도 『최전대통령이 진술서 작성에 동의한 것은 검찰 수사에 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주임검사등 수사진은 이날 하오 3시23분 최전대통령의 자택에 도착했다. 이들은 질문자료가 담긴 파란색 봉투를 들고 차에서 내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최비서관과 악수를 나눈 뒤 『오랜만입니다』라고 짧게 인사말을 건네고 부속실로 직행했다.
최전대통령은 지팡이를 들고 1층 응접실에 나와 김검사에게 『또 오셨네요』라며 맞았고 김검사일행은 『몸도 불편하신데 또 찾아왔습니다』고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응접실엔 최전대통령측에선 이변호사와 최비서관이 배석했다. 검찰은 1차 방문조사때는 수사관을 배석시키지 않았으나 이날은 수사관을 방문조사 자리에 입회시켜 강력한 조사의지를 보였다.
○…최전대통령의 집은 상오 7시께 측근들의 장시간 대책회의가 진행되는등 분주함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이변호사와 최비서관등 핵심측근들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는 검찰의 방문조사뿐 아니라 최근 민주당 강창성 의원이 제기한 「1백75억원 금품수수설」에 대한 대응방안도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측근은 『이변호사와 평소 친분관계가 있던 강의원이 서교동측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금품수수설을 제기해 어르신이 몹시 분노했다』면서 『명예훼손 혐의로 소송을 제기키로 하는등 법적 대응책을 신중히 논의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이현주·윤태형 기자>이현주·윤태형>
◎최씨 대국민성명 전문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작금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국민앞에 본인의 입장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본인은 본인의 임기기간중 일어났던 불행한 일에 대하여 매우 가슴아프게 생각해 왔습니다. 특히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아울러 고통을 받은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각별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본인은 이미 15년 몇개월전, 대통령 임기중에 있었던 광주문제등을 포함한 불행한 일에 대하여 정치도의상의 책임을 통감하여왔고 아무쪼록 그 상처와 아픔의 조속한 치유로 국민화합의 바탕이 다져지기를 염원하면서 대통령직을 사임한 바 있습니다.
그후 5공, 6공 그리고 현정부로 이어지면서 크고 작은 고비가 있을 때마다 12·12와 5·18 문제가 되풀이 논란되어 왔습니다.
88년 국회광주특위이래 지난 7월의 검찰에서의 12·12와 5·18 고소 고발사건에 이르기까지 국회와 검찰에서는 본인에 대한 증인 또는 참고인 조사를 요구하여 왔으며, 본인은 그때마다 당국요구에 그대로 따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온 바 있어, 여러분도 보도를 통하여 다 아시겠지만 이를 다시 요약하면, 『대통령 임기중의 공적인 행위, 즉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책무에 따라 처리된 국정행위에 대하여 후일에 와서 일일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면 국정을 소신대로 처리할 수 없으며,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전례를 만드는 것이고, 또 그러한 전례는 앞으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마저 없지 않아 이러한 전례는 앞으로 수많이 탄생할 대통령들의 직무수행에 두고두고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예상되는 바, 전직대통령으로서는 후임대통령들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전례를 남겨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점과 비록 일시적 비난의 화살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국가의 정통성과 계속성을 유지함과 아울러 대통령직의 독립성을 지키는 것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택하여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라고 생각하여 왔고 지금도 그 소신과 원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위와같은 소신때문에 본인이 검찰에 직접 진술은 하지 않았으나, 진실규명 협조차원에서 여러경로를 통해 진상이 알려지도록 노력한 바 있습니다.
12·12사건 조사에 있어서도 그날 밤을 같이 지새우며 공관접견실에서 사태에 대처한 국무총리와 재임시 보좌하던 분들이 이미 참고인 자격으로 대통령에 관한 사항까지 소상히 진술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5·18사태 조사 경우에도 그동안 검찰은 본 건과 관련하여 1980년 당시 국무총리 관계장관 측근 보좌관 각급 사령관 관계공무원및 기타 장병들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참고인들의 진술을 청취하여 당시 상황이 파악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10·26 사건이라는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국가적 비극과 비상사태에서부터 1980년 여름에 이르는 격동기는 첨예한 남북간 군사적 대치 상황속에서의 안보문제의 심각성뿐만 아니라 제2차 석유파동의 엄습에 의한 경제적 난국, 극심한 사회혼란등 참으로 예측 불허의 국가적 위기였으며, 본인과 본인의 정부는 이 일련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데 나름대로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현재의 국내 상황은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는 양상을 띠고 있음으로써 국민에게 불안과 혼란이 초래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향하여 갈등과 분열 대신에 상호 이해와 협력, 그리고 화합과 단결을 이룩하면서 국민 모두의 역량을 합쳐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1995년 12월 16일 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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