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그 추동세력을 제물로 삼아 전진하곤 한다. 자신을 낳아 준 정파에 승리를 보장하기보다 고난과 시련을 안겨다 주면서 달려가곤 한다는 말이다.동구라파의 민주화세력이 그러한 개혁정치의 희생자이다. 공산체제에 사형선고를 내리고 개혁에 나섰던 시민세력은 곳곳에서 수세에 처하고 공산당의 후예가 오히려 권력을 되찾는 실정이다.
그러한 역풍은 헝가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로 옮겨가더니 지난달에는 탈공산화투쟁의 기수인 바웬사까지 권좌에서 몰아내고 이제는 러시아의 차례라고 한다. 이번 주말에 치러질 총선에서 주가노프의 러시아공산당은 우파를 제치고 최다 의석을 차지할 전망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혁이라는 시대정신이 소멸한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가 부활할 태세인 것은 더 더욱 아니다. 실존과 생존의 의미를 밝혀주고 투쟁의 이론과 조직을 생산해내는 사상으로서의 공산주의는 이미 죽었다. 다시 정치의 중앙무대로 복귀한 공산당의 후예가 마르크스와 레닌에게서 대안을 찾기에는 과거의 독재 속에서 자라난 위기의 현재가 너무나 초라하기만 하다.
○부정이 아닌 계승
오히려 동구라파의 새로운 공산주의자는 전혀 공산주의적이지 않은 정치적 언어를 구사하면서 정계복귀에 성공하고 있다. 크바스니에프스키는 자신이 선거에서 물리친 바웬사의 개혁노선을 부정하기보다 계승하였다. 시장체제의 건설을 지속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자신의 선거공약으로 내놓은 상태이다. 낙선의 시련을 맛보았지만 바웬사가 설정해 놓은 개혁의 기본방향은 그의 개인적 좌절에서 오히려 강화되는 조짐이다.
그러나 크바스니에프스키정부의 미래가 순탄할 것같지는 않다. 역설적이지만 그가 계승한 것은 바웬사의 카리스마를 파괴한 개혁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바웬사의 개혁은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민영화는 실직자를 대량 생산해냈고 재정긴축은 복지지출의 삭감을 정당화하였다. 게다가 일반시민은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이 물가상승의 여파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사태까지 경험하였다. 일부는 자신이 짊어진 개혁의 경비에 반발하여 바웬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까지 하였다.
문제의 핵심은 「총론」과 「각론」의 긴장이었다. 시장 이외의 대안이 부재한 상황 하에서 개혁의 당위성을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 구체적 항목에 가서는 상당수가 이의를 제기하고 불만을 품었다. 『우리는 「나무」보다 「숲」을 보면서 개혁에 함께 나서야 한다』는 말에는 모두가 동의하였지만 정작 실천의 순간이 다가올 때 「우리」 속에 「나」를 포함시키는 희생정신은 상당수의 국민 사이에서 찾을 수 없었다. 크바스니에프스키가 바웬사와 달리 그러한 개혁의 긴장으로부터 자유로우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러한 동구라파의 정치적 상황 속에는 「우리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국의 문민정부 역시 단기간에 지지층이 증발하는 것을 경험한 바 있다. 아울러 개혁의 「총론」에는 찬성하지만 「각론」의 수준에 가서는 회의를 품고 문제를 삼는 여론에 곤혹스러워 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개혁정치의 필연적 결과이다. 문민정부가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우는 실명제와 부패척결등의 개혁은 일종의 공공선을 겨낭한 조치로서 「혜택」과 「경비」의 측면에서 비대칭성의 모순을 안고 있었다. 즉 개혁의 혜택은 국가사회 전체가 미래에 누리는 것인 반면에 그 경비는 일부 사회계층이 현재에 부담하여야 하는 것이다.
공공선에서 새로운 강력한 지지기반이 태어날리 만무하다. 전체가 누릴 미래의 혜택은 「현재」 「이 곳」에 살고 있는 「개개인」이 체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경비는 타깃계층의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일상적 삶 속에서 즉각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문민정부는 공공선을 추구하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의 후원세력을 하나하나 소외시켜버린 것이다.
○새시대개척 책임
이에 문민정부는 무력감에 빠질지 모른다. 그러나 과거청산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아울러 문민정부는 새로운 시대를 열 전환기적 세력으로서의 역사적 위상을 가지고 태어났다. 개혁의 과실을 맛보기보다 차기정부를 대신하여 개혁과정의 고통을 치러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혜택과 경비의 비대칭적 구조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역사적 소명을 다하려는 투혼의 함양이 절실하다. 아울러 기존의 개혁에 새로운 공공선의 정치를 가미시킬 지혜까지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공공선 창출의 경비는 국가사회 전체가 조금씩 나누어 내고 혜택은 그 일부가 차지하는―말하자면 이 사회의 진정한 약자를 위한 새로운 공공선의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다.<고려대교수·정치학>고려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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