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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온 12·12 그때 그 장군과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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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온 12·12 그때 그 장군과 병사

입력
1995.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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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 특전사령관 정병주/유족,자살설 일축 비문 안 새겨12·12와 5·18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적 단죄로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정병주 당시 특전사령관의 유족들이 12·12사건 16년을 맞는 감회는 또 다른 곳에 있다. 고인의 죽음에 대한 명확한 사인규명이 12·12의 실체를 밝혀내는 열쇠라는 믿음을 유족들은 버리지 않고 있다.

89년 3월4일 경기 양주군 한 야산에서 목맨 시체로 발견된 정장군의 사인은 숱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처리돼 12·12의 또다른 비극으로 세인의 머리속에 각인됐다. 동작동 국립묘지 제1장군묘역에 묘비번호 168번으로 안치돼 있는 정장군의 묘소는 그래서 아직까지도 비문이 없다.

유족들은 정장군이 강제예편된 후 84년「요아킴」이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에 귀의해 독실한 신자로서 생활해 온점을 들어 그의 자살설을 일축했다. 여기에 사고당시 유서등 자살을 입증할 만한 단서가 전혀 없는 점도 의문이라고 말한다.

고혈압으로 3년째 자리에 누워있는 부인 강남희(64)씨는 상관의 연행에 대항해 죽음의 길을 선택한 김오랑 당시 비서실장의 충심을 16년이 흐른 이날도 잊지 못하고 있다.<조철환 기자>

◎「전사」 국방부 초병 정선엽/7순 어머니 “이제는 여한 없어”

12·12의 희생자는 「별」만이 아니었다. 정치장군들의 반역에 맞서 초병의 의무를 다하다 「전사」한 이름없는 사병도 있었다.

79년 12월13일 새벽 정선엽(당시 23세)병장은 국방부 청사 후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갑자기 밀어닥친 공수부대원들이 『총기를 버리고 투항하라』고 위협했다. 다른 초병들은 모두 달아났다. 그러나 정병장은 자리를 고수했다. 그는 『국방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끝까지 지켰다. 정병장은 청사로 진격하는 공수부대원을 발길로 차다 무참히 총세례를 맞았다. 조선대 전자공학과 2학년을 마치고 입대, 제대 3개월을 앞둔 시점이었다.

정병장의 어머니 한점순(73·서울 관악구 신림동)씨는 11일 큰 아들 훈채(44)씨와 함께 동작동 국립묘지 제23묘역을 찾았다.

한씨의 지난날은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아들을 죽인 사람들이 통치하고 득세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던 한씨는 『차라리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며 아들의 사진과 앨범을 모두 태워버렸고 국립묘지조차 거의 찾지 않았다.

한씨는 『선엽이의 피가 이제서야 정당한 평가를 받게 돼 여한이 없지만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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