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자금 파동이후 시중에서는 어쩐지 화폐에 대해서 냉소적 분위기가 일고 있는 듯하다. 어찌 보면 화폐에 대한 허무감마저도 깃들고 있다. 그것은, 사유야 어찌됐든 시민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가 안가는 단위의 금액이 정치적으로 거래되고 비자금화한 사실을 보는데서 오는 일련의 허탈감일 것이다.이러한 사건에 대해서는 법적 정치적 처리도 중요할 것이나, 그것을 미래를 향해서 진정 교훈화하는 일이야말로 매우 큰 뜻을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경제사회의 진맥을 하면서 경제현상의 과열과 냉각여부를 진단해보고 인플레나 디플레를 걱정해보기도 한다. 또 1인당 소득이나 국민소득의 증감에 관심을 갖게 되고 기업은 이윤의 증감에 예민하게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경제사회의 대표적 상품인 화폐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화폐에 의해서 모든 거래가 매개되고 화폐를 추구하는 활동이 집합되어 형성되고 있는 것이 경제사회라 할 것이다. 화폐를 경제사회의 혈맥이라고, 또는 맥이라고 말하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적승인 필요
그래서 화폐는 누구에게도 거부되지 않는 일반적 수령성이 있고 일반적 구매력이 있으며 일반적 지불수단으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화폐는 법화로서 법적 강제통용력이 부여된다. 그러나 법적으로 통용력이 보장되어 있어도 사회적으로 거부된다면 화폐로서의 구실을 못하게 된다. 그런 까닭으로 화폐가 제 구실을 하려면 사회적 승인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의문이나, 사회적 직책에 대해서도 흡사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같다. 어떠한 지위나 직책에 대해서 법적 제도적으로 아무리 중요한 권능이 부여되어 있다 해도 그 구성원이나 국민이 그것을 존중하고 승인하지 않으면 사실상 그 직책을 수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국민적 존중과 승인 여부가 오로지 당자의 도덕성 성실성, 그리고 실천능력에 달려 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어쨌든 화폐가 그 본래의 기능을 다하려면 법적 승인과 사회적 승인을 아울러 필요로 한다. 악성 인플레가 만연되고 있을 때 화폐가치가 극도로 하락하면 사람들은 현물이나 귀금속등 실물가치가 큰 상품을 선호하게 되어, 원래 가장 존중되어야 할 상품인 화폐의 취득을 기피하여 화폐는 제 구실을 못하게 되고 경제사회는 질서가 붕괴되고 혼란이 야기되게 마련이다.
40여년전의 일이라 정확한 표현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으나, 한국은행법을 제정할 때 그 기초의 주역이었던 블룸필드씨가 6·25때 한국국민들은 극심한 전쟁인플레로 말미암아 휴지조각과 같이 가치가 없었던 한국은행권을 그래도 가치가 있는 화폐로 생각하며 이를 가지고 이의없이 거래하였기 때문에 경제질서가 그만큼이나마 유지됐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가치가 없는 한국은행권을 그래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국민들이 착각했던, 화폐에 대한 환각이 있었기에 경제질서가 유지됐다는 풀이가 된다. 일련의 착각의 효능이다. 당시 가치가 극도로 떨어진 화폐일망정 사회적 승인이 있었던 셈이다.
서두에 언급한 바, 이번 경우 국민이 화폐에 대해서 냉소적이란 것은 화폐가치의 하락 때문이 아니고 정치적 사회적 사건에 연유된 것이다. 이것 역시 화폐에 대한 사회적 승인의 부분적 훼손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화폐에 대한 사회적 승인의 훼손은 곧 국민경제 활력의 훼손을 초래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할 문제이다.
필자는 본란을 통해서 한국사회에서는 국민의 소득수준이 올라감에 따라 벌금의 징벌효과가 작아졌다는 지적을 함으로써 국민의 씀씀이가 헤퍼졌음을 경고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개성상인이 단돈 한 푼을 벌려고 백리길을 야행한다는 이재정신은 시장경제의 생리인 동시에 근성으로서 반추해볼만한 일로 생각된다.
○냉소적감정 씻게
자칫 만연되기 쉬운 화폐에 대한 국민의 냉소적 감정은 조속히 극복되어야 할 문제로 본다. 그것은 모든 경제적 거래의 정상적인 단위가액의 척도가 합리적으로 설정됨으로써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하여 화폐에 대한 국민의 감각과 관념이 복원되고 경제활동에 활력이 회복·증폭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 정계의 정책적 정치적 노력과 기업의 진정한 기업가정신에 입각한 경영, 그리고 국민의 냉철한 경제감각이 요청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경제란 사회의 하부구조이기 때문에 이것이 튼튼해야 비로소 다른 부문이 그 위에서 튼튼하게 자리잡을 수가 있다.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사건들은 그것대로 처리되어야 하되 국가나 사회가 가야 할 길은 제대로 가야 할 것이기에, 우리의 경제에 대한 감각과 화폐에 대한 관념의 조속한 복원을 촉구해마지 않는다.<서울대명예 교수·전국무총리>서울대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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