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환도산성(한문화 원류 기행:8)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환도산성(한문화 원류 기행:8)

입력
1995.12.08 00:00
0 0

◎대륙경영 야망 키우던 전진기지/고구려2대 유리왕때 축성/국내성 북방 높이5m·둘레7㎞/3면 봉우리에 싸인 천연요새국내성에서 퉁거우허(통구하)를 따라 북쪽으로 2.5쯤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산성과 마주친다. 광개토대왕 시절 대제국 건설의 전진기지가 바로 여기다. 광개토대왕은 치욕의 역사를 머금고 있는 이 산성을 전진기지로 삼아 중국대륙경영을 향한 원대한 포부를 하나씩 달성해 갔다.

위나암성 또는 산성자 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은 동, 서, 북 3면을 타원형으로 둘러싼 600여의 험준한 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축성됐다. 국내성이 평지에 쌓은 왕성인데 반해 환도산성은 유사시 왕과 백성이 결사항전할 수 있는 요새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 산성의 둘레가 6,951에 이르고 퉁거우허의 물줄기가 내부를 관통할 뿐아니라 농토와 연못까지 있어 외부와 단절되더라도 수만명이 2∼3개월이상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2대 유리왕이 수도를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긴 직후 쌓은 이 성은 고구려의 영욕을 목격한 역사의 현장이다. 3대 대무신왕때 한나라 요동태수의 침입을 「잉어작전」으로 물리친 통쾌한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가 하면 두 차례나 이민족의 말발굽아래 짓밟힌 치욕의 현장이기도 하다. 고구려는 이 치욕을 거울삼아 강대국으로 우뚝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동천왕 20년(서기 246년) 위나라 관구검에게 성을 빼앗겼고 고국원왕 12년(서기342년) 연나라 모용황의 침입 때는 선왕인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을 탈취당하고 왕모와 남녀 5만여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퉁거우허를 가로지른 산성자교를 건너 성의 남문에 들어서면 왼쪽에 10여호의 농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오른쪽으로는 산성하 고분군이 얕은 구릉처럼 이어진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봉우리들은 산허리까지 완만한 경사를 이루다가 갑작스럽게 솟아 올라 험준한 기세를 더해 준다. 경사지대에는 이 고장의 명산물인 수박을 비롯해 옥수수, 콩 등 밭작물이 잘 자라고 있어 매우 기름진 땅임을 알 수 있다.

산성에 3번 올랐었다는 조선족 안내인은 농가근처 「환도산성」 표석에 다다르자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산길이 험한데다 많은 사람이 움직이면 지안(집안)시당국의 의심을 산다고 그는 설명했다. 안내인과 일행 대부분을 남겨 두고 작가 두 명과 함께 정상의 성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밭두렁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100여를 가자 싸움을 지휘하던 전망대와 잉어작전의 현장 「음마지」가 나온다. 흙에 파묻힌데다 그 위로 무성하게 자란 풀과 나무에 가려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주춧돌이 듬성듬성 드러나 있다.

계단식 밭지대를 지나면 상수리, 아카시아, 옻나무 등이 들어찬 잡목지대가 시작된다. 급경사인데다 빽빽하게 늘어선 나무 때문에 기다시피 올라가야 했다. 2시간여동안 쐐기에 쏘이고 가시에 긁히며 정상에 서니 4∼5높이의 웅장한 성벽이 길손을 맞는다. 부분적으로 무너져 내리긴 했지만 천 수백년전의 옛 위용이 아직도 당당하다. 그 위용이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힘겨움을 한 순간에 씻어 준다. 맨손으로도 힘든 험산의 정상에 하나의 무게가 50㎏은 족히 될만한 돌들을 날라와 쌓아 올린 조상들의 지혜에 머리가 숙여진다. 성벽 바깥쪽으로는 수백길 낭떠러지가 폭포처럼 떨어진다. 3면을 감싼 험산 정상에 성이 올라 앉았으니 퉁거우허가 흘러 나가는 남쪽입구만 막으면 100만대군의 포위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성안쪽을 향해 돌아 서니 멀리 압록강이 보였다. 고구려의 숨결을 간직한채 압록강은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다.<최진환 기자>

◎환도산성 두차례 함락의 원인/1차­동천왕,쫓기는 위관구검 무모한 포위전/2차­고국원왕,연침입때 성급한 반격 화불러

난공불락의 요새 환도산성이 중국의 공격을 받아 두 차례나 함락된 데에는 전략부재와 무모한 반격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위나라의 관구검이 1만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침략했을 당시 동천왕은 두차례 전투에서 적군 5,000여명을 참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이후에 벌인 무모한 추격전이 화를 불렀다. 관구검이 패잔병 5,000여명을 수습해 산속에 견고한 방어진을 구축한 상황에서 비슷한 병력으로 포위공격하다가 패한 것이다. 적의 방어진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10배 이상의 병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병법을 무시한 결과였다. 왕은 환도산성을 빼앗기고 남옥저까지 쫓겨갔다가 밀우와 유유장군의 활약으로 관구검을 물리쳤다.

고국원왕때 침입한 연나라의 왕 모용황은 고구려출신으로 북쪽의 선비족을 동원, 중원통일을 꿈꿨던 야심가. 그는 5만5,000여명의 병사를 둘로 나눠 성의 남북지역을 집중공략했는데 성급한 왕이 군사를 내보내 반격하다가 패했다. 성을 점령한 모용황은 철수에 앞서 고구려의 복수를 두려워해 궁실을 불태우고 성벽까지 철저하게 파괴했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연에 한동안 조공을 바쳤고 결국 랴오둥(요동)지역 진출을 포기해야 했다.

◎작가 메모 송용씨

8월의 따가운 햇살아래 산성을 오르는 길은 무척 힘들었다. 양손에 화구와 카메라를 나눠 들고 급경사길과 씨름할 때는 산아래서 편히 그릴 것을 괜한 고생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꼭대기에 올라 성벽을 보는 순간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무성한 숲에 가려 언뜻언뜻 보이는 장대한 성벽에서는 고구려인의 힘찬 기상을 느꼈고 산아래 펼쳐진 고분군에서는 찬란한 문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40년 전남 장성출생

▲조선대 회화과 졸업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심사위원 역임

▲개인전 10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