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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과거청산,위기·저항도 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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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과거청산,위기·저항도 따랐지만…

입력
1995.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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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결단 앞엔 결국 “엄한 단죄”/구소·희·아르헨·태 「쿠데타 육탄저지」 민정수호지난 91년 8월 모스크바시 중심가인 러시아공화국 의회건물 「벨루이 돔」 앞. 수만명의 시민들이 구소련 보수파들이 동원한 탱크를 저지하기 위해 인의 장벽을 형성하고 3일간 시위를 벌였다. 보수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개혁의 물길을 돌리기 위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을 연금하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이같은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쳐 실패한 채 감옥으로 가야 했다. 국민들은 수구세력들이 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일으킨 쿠데타를 결코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위한 체제개혁이나 과거청산 노력은 으레 보수 수구세력들의 집단적 저항이나 반격에 부딪쳤지만 이를 막아낸 것은 무력이 아닌 건전한 상식을 가진 국민들의 힘이었다.

그리스의 경우도 지난 74년 여름 민간정부의 군부독재청산 작업에 반발한 보수반동 세력들의 쿠데타기도가 국민들의 저항에 밀려 실패로 끝났다. 7년간 계속됐던 그리스 군정은 74년 군부실권자인 파파도풀러스대령이 당시 키프로스전쟁을 위해 총동원령을 내리자 일부 군장성과 민간 정치지도자들이 이를 거부하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명목상 군정 대통령을 맡고 있던 기지키스장군은 정국혼란을 수습키 위해 민정이양을 전격 결정했다.

이에 따라 새로 구성된 과도민간정부가 일련의 민주화조치를 실시하려 하자 군부가 반발, 참모총장인 보나노스장군이 탱크부대를 동원해 수도 아테네를 포위하는등 쿠데타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때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국회의사당앞의 헌법광장에 모여 탱크부대의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 이를 막아 냈고 보나노스장군은 3일만에 굴복, 예편하고 말았다. 이후 민간정부는 국민투표를 통해 신헌법을 통과시켰고 이를 근거로 쿠데타의 주모자들을 처벌하게 됐다.

아르헨티나 역시 83년 민정출범이후 3∼4차례의 반동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그때마다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쳐 민주화의 대세를 역류시키지 못했다. 아르헨티나의 과거청산작업은 첫 민선대통령인 라울 알폰신대통령 취임이후 추진됐으나 이에 위협을 느낀 군부세력은 87년 쿠데타를 감행하는등 끊임없이 저항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알폰신을 굳건히 지지했고 이에 힘입은 알폰신은 군부와의 힘겨루기에서 끝내 승리, 과거청산작업을 어느정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알폰신은 비록 경제실정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나기는 했으나 집권기간에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과거 수만명의 민간인을 납치, 고문 또는 학살한 군부의 「추악한 전쟁」의 실상을 파헤치고 관련자를 단죄할 수 있었다.

태국의 군부통치도 92년 5월 국민들의 민주항쟁으로 막을 내린바 있다. 수친다 크라프라윤 육군사령관은 91년 2월 쿠데타로 집권, 총리에 취임했지만 독재정치와 부정부패등으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강권통치로 탄압했고 급기야는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게 됐다. 「태국판 5·18사태」로 불리는 이 사건의 여파로 그는 시민과 학생들의 계속된 시위에 끝내 굴복, 권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이장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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