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한 장대석 1,100개 “동방의 피라미드”/기단 한변 29m 높이 11m 당당함/고구려 옛도읍 1,500년 지켜오고/곳곳 훼손,붕괴우려엔 가슴 저며지안은 압록강중류 북한의 만포 건너편에 있는 소도시. 조선족 2만3,000명을 포함해 22만명이 살고 있는 이 도시는 동으로 용산, 북으로 우산, 서로는 칠성산으로 둘러 싸이고 남쪽에는 압록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림수의 땅이다. 삼국사기에 「산수가 매우 깊고 험난하고 땅이 부드러워 오곡을 심기에 좋으며, 쌀 사슴 물고기의 생산이 많은 곳」으로 기록돼 있을 만큼 수도로서 완벽한 조건을 지닌 지역이다.
유리왕 22년(서기 3년)부터 장수왕15년(서기 427년)까지 424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던 이곳에는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국내성, 광개토대왕릉비, 환도산성을 비롯해 도시주변에 널려 있는 수많은 고분은 동북아의 패권을 장악해갔던 강국에 고구려의 위용을 확인해주는 증거들이다. 특히 시내 곳곳과 들판, 야산등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고분들은 당시의 놀라운 건축기술과 국력을 보여준다. 여기서 출토된 벽화는 탁월한 미술문화수준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백두산등정을 마치고 푸순(무송) 퉁화를 거쳐 지안에 도착한 일행은 지안박물관―5회분 5호묘―장군총―광개토대왕릉비로 이어지는 패키지 코스에 따라 유적과 유물을 둘러보았다. 1인당 가격은 8달러. 안내인들은 한국인관광객 안내에 이골이 난 사람들. 능숙하게 현장을 소개하면서도 경계의 눈빛을 늦추지 않는다. 혹시라도 사진찍지 않을까 감시하고 사소한 질문에도 대답을 회피한다. 동행한 조선족안내인은 『2∼3년전 한국조사팀과 결탁해 비공개지역에 드나들었던 박물관장이 최근 철직 당했는데 그 일로 통제가 더욱 강화된 것같다』고 귀띔한다.
박물관과 5호묘 관람을 서둘러 마친 일행은 동쪽 용산아래에 우뚝 솟아 있는 장군총을 찾았다. 시주변에 있는 왕릉 18개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 이 고분은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릴 만큼 웅장하고 신비한 석총이다.
밑변 기단 한변의 길이가 29, 중심부의 높이가 11에 이르는 규모도 놀랍지만 1,100개의 장대석을 계단식으로 정밀하게 축조한 과학기술이 더욱 신기하다.
특히 무게가 50톤에 이르는 거대한 돌을 20여나 떨어진 곳에서 끌어오고 천장위에 올려 놓은 것은 현대과학도 풀지 못한 불가사의라고 하니 고구려인의 뛰어난 지혜와 높은 문화수준을 헤아리기 어렵다. 동쪽 측면에 설치된 철제계단을 따라 꼭대기에 오르자 시원스레 펼쳐진 퉁거우(통구)평야와 그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강건너 북한땅에서도 가장 뚜렷이 보이는 유적이 장군총이라고 한다.
하지만 장군총은 몰려드는 관광객과 관리부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외벽의 돌틈 사이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은 둘째치고 기단의 장대석들이 하중을 견디지 못해 바깥쪽으로 밀려나고, 일부는 안쪽으로 기울어져 불안해보였다. 내부의 흙이 가라앉으면서 틈이 커져 붕괴의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분에 오르는 철제계단이 훼손을 초래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됐다. 관리직원에게 이런 지적을 하자 『최근 몇년 사이 상태가 나빠진 것은 알고 있지만 예산이 없어 손을 못대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지안박물관 벽면에까지 「고구려는 우리나라 동북소수민족 중의 하나」라고 악착같이 써붙였던 중국인들이 유네스코의 중요문물지역으로 지정된 「소수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방치한 현장이었다.
고분의 주인공이 광개토대왕인지 장수왕인지 아직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고 있지만, 근처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고구려가 전락해 멸망하게 될 때를 대비, 내가 공격해 취해온 주변족속들에게 무덤관리를 맡기고 이를 소홀히 할 경우에는 엄한 형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새겨져 있어 후손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최진환 기자>최진환>
◎장군총엔 누가 묻혔을까/기록·유물없어 90년넘게 피장자 몰라/형식·규모로 광개토대왕·장수왕 추정
1905년 일본과 프랑스의 학자에 의해 처음 알려진 장군총은 지금까지도 그 피장자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역사서에 기록된 사실이 없고 이미 오래전에 도굴돼 묘실내에서 한 점의 유물도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크기와 형식등으로 미루어 광개토대왕 또는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왕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주장이 양분된다.
먼저 일본사학계와 일본의 영향을 받았던 우리 국사학계의 초기학자들은 광개토대왕의 묘로 보았다. 5기에 이르는 배총이 있고 형태가 돌무지무덤의 최종단계인 기단식 돌방무덤이며 주변에 광개토대왕릉비가 서 있는 점등을 그 근거로 내세웠다. 고 이병도 김원룡 박사도 단정짓지는 않았지만 이 주장에 동조했다.
그러나 최근 중국학자들을 중심으로 장수왕의 묘라는 학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광개토대왕릉비 부근의 태왕릉에서 출토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태왕릉이 산처럼 굳고 안전하게 하옵소서)」이라는 명문을 그 증거로 보고 있다. 태왕은 광개토대왕을 지칭하므로 결국 장군총은 장수왕의 묘라는 주장이다. 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장수왕이 지안에 묻힌 것은 평양천도후에도 국내성을 중시한 정책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작가 메모/노광씨
장군총은 고구려인의 호방한 기질과 진취적 기상을 상징하는 대표적 유적이다. 장대석 1,100개를 쌓아올린 웅장한 규모가 주변을 압도하며 고구려의 건축비술과 강성했던 국력을 보여준다. 장군총을 소재로 택한 후 그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구도를 잡으려 했지만 만족할 만한 모습이 잡히지 않았다.
장군총을 둘러싼 설치물과 무계획하게 심어진 나무들이 시야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분의 일부와 고분의 각면에 세워진 버팀돌을 통해 전체의 위용을 상상하게 하면서, 왕의 애첩들의 묘로 추정되는 배총을 눈요기로 넣었다.
▲49년 공주 출생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3회
▲개인전 4회
▲신미술회, 신작전 등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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