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재일동포 방문 붐 함께 「돌아와요…」 대히트/프로정신 바탕 록·트로트 등 장르불문 완벽소화조용필(45)은 가요사의 한 시대를 굵고 찬란하게 장식한 기린아이다. 슈퍼스타로서 그의 삶의 궤적은 음악적 완성을 위한 투철한 프로정신으로 이어져 왔다. 그는 영혼을 깎아내듯이 깊은 울림을 지닌 음악으로 대중의 우상이 되었다.
정한이라는 한국적 정서에 흠뻑 젖은 듯한 노래와 음성, 충실한 무대 매너,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 도전정신등이 그의 성공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는 록에서 트로트까지 모든 장르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탁월한 역량을 갖추었다.
경기 화성군 송산면에서 태어난 조용필은 서울 경동고를 졸업하고 1969년 컨트리그룹「에트킨스」, 71년 「김트리오」등에서 무명음악인으로서 기량을 쌓아갔다. 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황선우 작사·작곡)를 발표했다. 재일동포의 한국 방문 붐과 시기적으로 맞은 이 노래는 불길처럼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조용필은 대마초 사건으로 가요계를 떠났다.
그는 활동을 못하는 동안 목소리를 틔우기 위해 판소리 연마자들조차 고통스러워하는 득음의 고행을 하면서 권토중래를 꿈꾸었다. 목에서 피가 나는 것은 예사였고 구겨버린 오선지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 돌아서 눈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되어 거리에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 …>창가에>
1980년 조용필은 동아방송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 「창밖의 여자」(배명숙 작사, 조용필 작곡)로 재기하면서 길고 탄탄한 인기의 길로 들어섰다. 그해 주요 방송사의 최고가수상을 휩쓴 그는 「미워 미워 미워」(81년) 「못찾겠다 꾀꼬리」(82) 「나는 너 좋아」(83) 「눈물의 파티」(84)등 해마다 3∼4곡의 히트곡을 냈고 이러한 히트곡 행진은 「서울 서울 서울」(88) 「큐」(89) 「꿈」(91) 「슬픈 베아트리체」(92)등 90년대까지 이어져 왔다.
그는 외국 특히 일본에 한국 가요를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 일본의 열성팬들은 아직도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서울에 몰려오곤 한다.
『모든 음악인들이 바라는 것이겠지만 후배가수들이나 대중이 오래 기억해주는 가수가 되는게 꿈이죠』 그는 꿈을 이루었다. 『80년대에 조용필이라는 대가수가 있었다』라는데 반론을 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권오현 기자>권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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