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곤 하지만 국민이 뽑았던 전직대통령의 처참한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의 자기기만능력의 극치를 보았다. 노씨사건으로 나라 안이 온통 북새통이 되어 있는데 나라밖 일본에서는 과거사를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궤변들이 난무하고 있다. 망언―경고―사과의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는 한일관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일본지도층이 어떠한 역사관을 갖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일본내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과거사에 대한 일본인의 관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범주로 나뉘어진다.○망언·사과 악순환
첫째는 이른바 「아시아해방론」이다. 일본이 아시아를 서구의 침략으로부터 해방했다는 주장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천부당 만부당한 얘기이나 일본의 보수적 지도층의 뇌리에 아직도 화석처럼 남아 있는 망상이다. 그리고 일본 식민지 통치기간에 있었던 일련의 정책이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다는 발상도 궤를 같이 한다. 「에토망언」이 바로 이 경우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식민통치는 피식민지국가의 전통을 파괴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의 근대적 요인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식민정책은 어디까지나 식민지 본국의 이익에 봉사했다는 점에서 피식민지국가의 이익과는 무관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엄청난 파괴와 손실을 가져왔던 것이다. 우리 국민을 성나게 한 「한일합방 합법론」도 지금까지 일본정부의 사실상의 공식 견해이며 1965년 한일기본조약때 우리가 제대로 따지지 못했던 부분이다. 이처럼 한일합방이 합법적이고 식민통치가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다는 발상이 일본의 보수적 지도층의 뿌리 깊은 관념이라면 망언의 망령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기회있을 때마다 나오리라고 봐야 한다.
둘째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조선에 대한 침략이라고 보고 그것을 분명히 사과하고 반성한다는 입장이다. 호소카와 전총리나 무라야마총리 자신의 기본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정치세력 가운데는 일본사회당 소속의원들이 대부분 이 카테고리에 속하며 양심적인 지식인이나 적지 않은 시민단체들이 이러한 역사관을 갖고 있다. 이는 과거사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에서 분명히 달라진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일본정부, 특히 외무성이 공식적으로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과거사문제에 관한한 한일간의 쟁점은 크게 해소되리라고 본다. 그러나 예견할 수 있는 장래에 일본정부와 평균적인 일본국민이 이러한 역사관을 공유하게 되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셋째는 첫째와 둘째의 혼합형이다. 지난번 전후 50년에 즈음한 일본의 국회결의가 그 좋은 예다. 한마디로 이 국회결의는 일본의 공식 견해와 그 공식 견해에 비판적인 관점의 혼재이며 과거사문제에 관한 일본인의 알맹이 없는 절충에 불과하다. 이 결의는 세계를 향해서나 한국에 대해서 호소력이 전혀 없고 일본인을 위해서도 의미 있는 결단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대통령이 꼭 일본의 역사인식에 대해 비판할 필요가 있었다면 바로 이 국회결의에 대해 「정상일침」을 놓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김영삼―호소카와회담때 모처럼 설정해놓은 공통의 역사인식을 일본국회가 흩트려 놓았기 때문이다. 침략 대신에 침략적 행위, 반성대신에 반성의 염이라는 말을 발굴해낸 일본당국의 의도에서는 도덕적 메시지라고는 추호도 느낄 수 없다. 개인적으로 정직하고 반성을 잘 하는 일본인이 정부나 국가의 결정에는 왜 이렇게 자기기만적 태도를 보이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원칙과 사려 긴요
바야흐로 한일관계는 무라야마총리와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이 오고 가는 과정에서 또 다시 망언―경고―사과라는 해묵은 사이클을 돌고 있다. 곰곰 생각해보면 한일관계를 이렇게 나쁘게 만든 원죄는 일본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지도층에도 잘못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60년대의 한일조약 체결과정에서나 70년대 냉전시대의 우리 지도층은 한일관계의 「역사(반공)」를 문제삼기보다는 「경제」와 「반공(반공)」의 필요 때문에 무원칙한 유착관계에 안주해왔던 것이다. 과거사문제에 있어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한일관계의 현실을 지금에 와서 일거에 뒤집기는 어렵다. 지금 우리는 좋든 궂든 1년에 400억달러의 교역량과 300만인 이상의 교류로 여러 분야에서 엄청난 상호의존관계에 있는 한일관계의 현실을 직시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두 나라 사이에 국가이익의 상호성이 존재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양국의 지도층은 서로가 상대방을 자극하는 발언을 일삼을 필요가 없다. 모든 외교관계가 그러하지만 특히 한일관계에서 양국지도자들이 견지해야 할 것은 원칙과 사려이다. 여기서 말하는 원칙은 사실의 확인을 통한 올바른 역사인식이요 사려는 원칙을 지키되 상대방의 현실적 입장을 고려에 넣고 적절한 수단을 선택해나가는 자세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자원은 정치가의 말이다. 말은 적절하면 촌철살인의 위력을 가지나 그렇지 못하면 원칙도 흔들리고 사려도 잃게 된다.<최상용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최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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