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대통령의 축재비리사건으로 검찰에 소환된 한 재벌총수는 『등교길에 깡패가 돈을 달라고 해서 돈을 준 것이 잘못이냐』고 말했다고 한다. 검찰청을 나오면서 『국민에게 죄송하다』고 말한 총수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통령이 돈을 달라고 해서 준 것이 무슨 죄냐는 이 재벌총수의 말은 이번 사건에 대한 우리나라 재계의 입장을 대변이라도 하는 것 처럼 보인다.과연 그럴까. 정말 우리나라 재벌총수들은 대통령의 강요와 주변의 협박이 무서워서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의 돈을 갖다 바친 것일까. 항상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돈을 갖다 바치면 그만큼의 반대급부가 보장된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오히려 반대급부를 노리고 돈을 안겼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몇가지만 예를 들자. 대통령에게 준 돈을 공사를 제대로 하는데 썼더라면 그렇게 숱한 부실공사가 있지도 않았을 것이며 수백명의 인명을 앗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돈을 기술개발등 경쟁력강화와 근로자복지에 썼더라면 우리경제가 선진국의 문턱에서 주저앉을 것이라는 걱정도 이만큼 심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재벌들은 정경유착의 책임을 단지 정치의 후진성에만 돌리고 자신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투다.
이 사건이 계속되면서 국민은 『경제는 살려야 한다』며 경제를 걱정하고 있다. 물론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재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국민의 주문은 재벌들에 면죄부를 주라는 것은 아니다. 반성과 참회 없는 재벌들의 경제살리기는 재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씻기는커녕 그 틈을 더 넓히기만 할뿐이다. 재벌들의 각오가 새로워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번 사건은 또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경제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재벌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을 알려주고 있다. 재벌총수들이 떡값이든 뇌물이든 거액을 대통령에게 갖다 바치게 된 것은 결국 자신들이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에 대한 규제를 피하기 위한 것이며 재벌총수가 기업의 돈을 자신의 주머니 돈처럼 마구 쓸 수 있었던 것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영자의 역할과 책임이 주주(소유자)의 감시를 받을 수 있도록 소유와 경영이 명실상부하게 분리되면 지금처럼 오너가 기업에서 아무렇게나 돈을 빼돌리지 못하게 돼 정경유착의 가능성도 줄어들게 된다. 규제완화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보다 더 시급한 과제다. 기업에 대한 각종 간섭과 규제는 정경유착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간섭과 규제를 피하기 위해 갖다 바치는 돈이 뇌물이자 떡값이며 온갖 부패의 원천인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소유와 경영의 분리와 규제완화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추진해 왔지만 아직은 요원한 것임이 이번 사건을 통해 명백히 드러났다. 업종전문화를 강화하겠다느니, 전문경영인제도를 정착시키겠다느니 각종 시책을 내놓았지만 시늉에 불과했음이 확인됐다. 규제의 고삐가 질길수록 정경유착의 뿌리 역시 질겨질 수밖에 없고 재벌총수가 기업의 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구조에서는 이 뿌리를 절대로 잘라낼 수 없다. 온 국민이 걱정하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부도 각오를 새롭게 해야만 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