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삶 자체가 시임을 일깨운 작품동요시인 권태응의 시집이 이제야 나왔다. 참 너무 늦었다. 유달리 농촌과 농민을 사랑하고 어린이와 자연을 사랑했던 이 동요시인의 시는 마땅히 40년대와 50년대, 그리고 60년대를 살아가던 어린이들이 읽어서 그 작품들에 담겨 있는 삶과 정서를 제 것으로 확인하고, 그래서 다시 그 세계를 넓혀가야 했던 것인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시인의 경우에도 우리 겨레의 정서가 이어지지 못하고 불행하게도 중간에서 거의 끊겨 버렸던 것이다.
이 시집이 너무 늦게 나왔다는 것은 오늘날 아이들은 거의 모두 감자를 샛밥거리로 즐기지 않고, 감자꽃 피는 시골을 알지 못하고 낯설은 땅으로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읽어야 하겠지만, 아무튼 이제는 그만큼 우리 아이들이 삶을 잃었다는 사실을 바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권태응동시집에서 그 무엇보다도 값진 것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이어주고 싶은 것은 건강한 농촌어린이들의 삶과 그 삶에서 우러난 정서다. 자연 속에서 일하고 뛰노는 삶, 그것보다 더 아름답고 참된 삶이 또 어디 있는가? 맨발로 도랑물을 건너서 고추밭에 고추를 따러 가고, 새빨간 구기자밭 위를 새빨간 고추잠자리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휘파람을 불며 송아지를 몰고 가는 아이들의 삶은 그대로 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감자꽃」(창작과비평사간)의 동요시들은 삶을 떠나서 얘기할 수 없다. 일제시대부터 우리 동요·동시들이 「동심」이란 것을 곱게 분칠해 놓은 것은 얼마든지 있지만, 아이들의 삶이 그대로 시임을 보여준 작품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래서 이 권태응의 동시조차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바로 「감자꽃」이라는 작품만 해도 그렇다. 흔히 자주꽃과 하얀 꽃을 맞견주어 놓은 것이 재미있다든지, 이 동요가 일제시대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숨은 뜻을 담아 놓았다든지 하는데, 내가 보기로 이런 의견들은 이 작품에 담긴 삶과 정서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생각이다. 감자꽃 피는 오월, 밭둑이나 밭옆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이 감자밭을 보면서 어째서 두 가지 꽃이 피는가 하고 주고 받는 말을 하는 그 아이들의 삶을 떠나서는 이 동요의 맛을 알 수 없다고 본다.
권태응의 동요는 기교가 없고, 너무 단순하고 소박한 자리에 머물고 있다고 요즘 동시인들은 말할 것같다. 그러나 단순함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어린이의 것이다. 소박함이야말로 건강한 삶에서 오는 것이고, 알맹이가 꽉 차 있는 모습이다. 만약에 우리 아동문학이 동시고 동화고 단순 소박함을 잃었다면, 지금이라도 이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라 믿는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