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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기도합니다(화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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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기도합니다(화요세평)

입력
1995.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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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이 땅을 굽어 살피시는 신에게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지금 비자금파동으로 이 나라가 휘청거리고 있사오니 이 미증유의 국난을 헤쳐나갈 길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의 전직대통령들은 축포와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던 취임식에서 바른 손을 번쩍 들고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하였고 모든 부정을 척결하고 부패를 뿌리뽑겠다고 온 누리에 굳게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퇴임후 부정축재에 대한 국민의 분노의 함성으로 벼랑에 몰리자 「말로는 다할 수 없이 부끄럽고 참담한 심경」이라며 무릎꿇고 사죄한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 나라를 대표했던 전직대통령들의 그 모습은 바로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준 우리들 모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고개를 들 수 없는 치욕의 순간입니다. 우리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도 불행이 거듭되어야 하는지 억울하고 원망스럽기도 합니다.○사지에 빠질 위기

그러나 이제는 이성을 되찾아 나라가 흔들리지 않도록 정신을 가다듬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 사직당국에서 비자금 진상을 캔다고 수선스럽지만 그 당국이란 지난 날 여러가지 일로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 듯 합니다. 그리하여 그곳을 바라보는 국민의 눈은 부드럽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수사의 한계를 그어버린다면 이 나라는 영영 바로 설 길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열등국가로 낙인찍히고 말 것입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고비입니다. 이미 우리는 전대미문의 부패국가의 오명을 뒤집어 써버렸지만 그것이 진실대로 밝혀지고 정의롭게 처리되지 못하였을 때는 회생불능의 사지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수호신이시여! 그 사정관리들에게 그 누구도 간섭함이 없도록 지켜봐주시고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위해 과감하게 정의의 칼을 휘두를 수 있도록 힘을 북돋워주시며 수사에는 방법은 있어도 방침은 없는 법이며 인간만 사는 곳에 성역은 없음을 일깨워 주시옵소서. 지금 나라를 바르게 이끌어 주어야 할 이른바 정치지도자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참회하며 자숙할 줄도 모르고 그저 발뺌에 급급하며 자고 나면 사생결단이라도 할 듯이 남을 헐뜯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차라리 이전투구라면 사람의 구경거리라도 되련만 이들의 시궁창물 끼얹기는 탄식만 나올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정치지도자라고 믿기 어렵기에 오직 신의 계시만을 기다리고 있을뿐입니다.

지금 시정에서는 모여 앉으면 욕설과 한탄의 넋두리만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0이 몇개가 이어져야 천억이 되는지 세어볼 줄조차 모르는 서민들은 연일 터져나오는 언론보도에 놀라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도 허탈감에 빠져버리기도 합니다.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여야 할 언론에도 아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지나친 경쟁의식 때문에 흥미를 돋우는데 정열을 쏟고 있기에는 너무나 사태가 위중합니다. 있었던 일을 그대로만 알려주면 나머지는 독자나 시청자가 나름대로 평가하게 마련입니다. 오늘의 이 난국을 재미로만 바라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고 국민의 감정이 오도되면 결코 좋은 일이 되지 못함을 언론기관에 일러줄 사람이 없는 듯합니다.

신 앞에 기도하여야 할 걱정거리는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해야 합니다. 지금 나라를 뒤엎겠다는 북의 무장공작원이 마치 제 고장인 듯이 대낮에 서울 한복판을 활개치고 다니다가 요행히 발각되어 총격전 끝에 잡혔다고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 이 나라를 지키라고 온 국민을 크게 꾸짖어 주시옵소서. 또 지금 특급재벌의 대열밖에 선 이 나라 기업가들은 북받치는 울분과 실의 때문에 일손을 놓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중소기업을 육성하겠다고 내걸었지만 사실은 구조적 정경유착 때문에 그들이 희생양이 되어왔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가라앉게

또 신에게 바라옵건대 피땀 흘려 일하는 근로자들과 공무원들의 자학섞인 분노를 가라앉게 하고 성실하게 일하게 하는 묘약을 내려주시고 이 나라의 기성세대는 모두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렸으니 교사나 부모들이 제자나 자녀들에게 그럴 듯하게 변명할 말을 가르쳐주시며 몇 푼 안되는 것을 훔쳤거나 협잡했다고 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도, 또 사소한 뇌물죄로 목이 잘린 공무원들에게도 행여나 그들이 세상을 원망하지 말도록 선도하여 주시고 지난 며칠 사이에 일그러져버린 도덕감각과 가치관을 제 자리에 돌아오도록 인도하여 주시며 잘못을 엄격하게 다스려 다시는 이 땅에 엄청난 검은 비리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이 곳의 모든 인간에게 탐욕을 버리게 하며 유리알같은 맑은 사회가 이룩되도록 정의의 이름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눈물로 축수합니다.<박승서 변호사·전 대한변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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