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교역 수교 3년만에 3배 껑충/2000년대 수출입 500억불 최대 교역국 전망/대중투자도 급증 작년 1,989건 16억불 달해92년 수교이후 한중 양국의 경제교류는 지난 40년간의 단절을 단숨에 메우기라도 하는 듯 숨가쁘게 확대돼 왔다. 수교이전인 91년 44억달러였던 양국 교역규모는 지난해 116억달러 규모로 커져 3년동안 3배에 가까운 신장세를 보였다.
중국은 이미 우리에게 미국과 일본에 이은 세번째 교역대상국으로 떠올랐고 우리 역시 중국의 7대 교역국으로 부상했다. 9월말 현재 양국간 교역규모는 수출65억1,000만달러, 수입54억달러등 119억1,000만달러수준. 연말이면 150억달러를 무난히 돌파할 전망이며 2000년대에 들어서면 500억달러를 넘어서면서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상대국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동안 무역불균형을 보였던 양국교역은 지난해부터 균형을 회복하면서 안정적 확대기조를 유지하고있는 상태다.
지난해 양국교역을 품목별로 보면 한국수출은 섬유류가 12억4,800만 달러로 가장 높은 비중(20.1%)을 차지하고 있고 11억6,200만달러의 화학제품, 9억3,000만 달러의 철강및 금속제품, 8억7,000만 달러의 기계류 수송용기계가 그뒤를 잇고 있다. 중국의 수출은 섬유와 농수산품 광산물등 경공업제품이 19억800만 달러(35%)로 주류를 이루었다. 교역내용면에서 한국의 자본재상품과 중국의 원자재및 경공업제품이 상호교환되는 보완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도 중국경제가 9차 5개년 계획기간에 연평균 10%에 달하는 고도성장을 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한국의 대중수출은 중간재와 자본재 내구소비재등을 중심으로 증가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양국간 투자부문의 진전도 괄목할만하다. 92년5월 양국간 투자보장협정체결이후 급증한 한국의 대중투자는 91년 112건에 8,500만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지난해 1,989건(허가기준)에 16억7,600만달러를 기록했다. 이같은 규모는 한국의 해외총투자액의 절반을 넘기면서 중국이 최대의 투자대상국으로 부상했음을 반영하고 있다. 투자지역과 양상도 바뀌고 있는 추세다. 초기에는 조선족들이 많은 동북3성과 발해만지역을 중심으로 중소기업들에 의한 소규모 제조업이 근간을 이루었으나 최근 대우 삼성 현대등 대기업들이 중국 진출에 강한 의욕을 보이면서 투자규모도 대형화하고 있다. 제3국 수출을 위한 생산기지의 개념에서 폭발적인 내수시장을 겨냥한 품목 전환도 투자변화에 한몫을 하고 있다.
장쩌민(강택민)주석의 방한은 교역 투자 산업협력등 각분야의 한중간 경제협력을 한단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강주석의 방한일정이 경제4단체장과의 오찬, 국내 주요기업들의 공장방문등에 초점을 맞춘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의 장행복 중국실장은 『강주석이 방한하는 것은 한국 경제배우기에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면서 『어느정도 실리가 기대되는 만큼 강주석의 방한기간에 2000년 세계최대시장으로 예상되는 중국시장공략의 기반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이재렬 기자>이재렬>
◎강택민은 누구인가/13살에 숙부 양자로 들어가… 대학재학중 입당/문혁수난 등 딛고 천안문사태후 「최고 실력자」로
장쩌민(강택민) 중국국가주석은 26년 8월 장쑤(강소)성 양저우(양주)시의 지식계급 가문에서 태어났다. 강주석의 운명은 그가 13세 나던 해 공산당원이자 항일투쟁 영웅인 여섯번째 숙부 장상칭(강상청)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급변한다. 이곳에서 양부의 전우였던 천이(진의), 장아이핑(장애평), 리셴녠(이선념)등 공산당 초창기 지도자들을 만났으며 이들은 그의 평생 후원자가 되었다
상하이(상해) 교통대학 재학시절부터 공산당 지하활동에 가담한 강주석은 46년에는 정식으로 공산당에 입당했다. 당시 차오스(교석·전인대 상무위원장), 우쉐첸(오학겸·전국정협 부주석)등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어 현재도 유력한 정치적 배경이 되고 있다.
문혁때는 수난과 박해를 받기도 했으나 76년 4인방 축출후 상하이주재 중앙파견 공작원이 되면서 중국의 고급간부층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고 이후 82년 당중앙위원, 83년 전자공업부장(장관), 85년 상하이시장에 임명됐다. 87년 11월 중국공산당 13차 당대회(13대)에서 상하이시 당서기와 정치국원에 선출됐다. 89년 6·4 천안문사태후 13기4중전회에서 당서열 1위인 당중앙위원회 총서기에 선출된 강주석은 같은해 11월 13기5중전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90년 전인대 제7기 3차 회의에서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등소평)으로부터 승계받아 중국의 제3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92년 10월에 개최된 14차 당대회(14대)에서 총서기, 당군사위주석에 연임됐고 93년3월 제8기 전인대에서 국가주석겸 국가 중앙군사위원회에 선출됨으로써 당·정·군의 최고직위를 모두 차지했다.
강주석은 양부가 혁명열사로 믿을 수 있는 가문출신인데다 테크노크라트로서의 장점을 갖고 있고 원로들의 후광, 또 모나지 않는 성격으로 신진엘리트그룹들과 돈독한 인간관계를 쌓은 것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강주석은 중국오페라로 불리는 경극의 애호가로 노래를 부를 정도이며 이밖에 피아노와 피리연주에도 일가견이 있다. 그림 솜씨 역시 수준급인 강주석은 외국어에도 능통, 영어와 러시아어외에 루마니아어도 할 줄 안다. 강주석은 상하이출신인 부인 왕예핑(왕야평)사이에 민캉(민강) 멘캉(면강) 두아들과 양자 한명을 두고 있다.<베이징=송대수 특파원>베이징=송대수>
□한중 관계일지
▲83.5=중국민항기 피랍으로 중국 대표단 방한.
▲85.9=정부, 첫 대중투자 허가.
▲88.9=중국, 서울올림픽 참가. 대한 항공기 중국영공통과 허가.
▲88.10=정부, 중국관광금지 해제.
▲89.6=한중 양국간 해운 정기직항로 개통.
▲90.9=정기여객선 인천웨이하이(위해) 최초 취항.
▲92.7=한중 투자보장협정 발효.
▲92.8.24=한중 수교.
▲92.8=주한중국대사관 개설.
▲92.9=노태우 대통령 중국 방문.
▲93.5=한중 외무장관 회담 서울에서 개최.
▲94.3=김영삼 대통령 중국방문. 한중 이중과세방지협정체결.
▲94.7=한중 직항로개설협정 가서명.
▲94.10=리펑(이붕)총리 방한.
▲95.3=리펑총리 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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