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코리아 퍼레이드를 무색하게 하는 재벌총수 퍼레이드가 지난 며칠동안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무대는 대검청사, 건물앞에서 자동차를 내려 현관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기까지 이삼십미터를 어떻게 품위있게 걸어가느냐가 그들의 숙제다.그들의 일거일동은 신문·방송의 취재에 완전히 노출되어 미세한 표정의 변화나 숨소리까지 온국민에게 전달되고 있다. A는 담이 센것 같았고, B는 심약해 보였고, 취재진을 향해 여러번 고개숙여 인사한 C는 순진하게 보였고, D는 양복맵시가 좋았고, E는 관상이 좋았고, F는 나이에 비해 영감같았다는등 곳곳에서 재벌 촌평이 한창이다. 연일 재벌 퍼레이드를 보았더니 신물이 난다는 사람도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수사중인 검찰은 날이면 날마다 재계의 기라성같은 인물들을 소환하고 있다. 4일부터 10일까지 20명이 조사를 받았고 계속 소환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재벌총수들의 얼굴을 실컷 구경하면서 사람들은 차츰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다. 도대체 저 많은 재벌들을 단 몇시간씩 조사하여 어떻게 진실을 파헤칠 수 있는가라는 의심, 약식수사를 덮기 위해 의도적으로 요란한 퍼레이드를 벌이는게 아닌가 라는 의심이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혹시 재벌총수들을 줄줄이 불러들이는 것 만으로도 국민감정이 어느정도 풀릴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전직대통령 소환까지 지켜본 마당에 재벌 소환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지금 국민이 원하는 것은 퍼레이드 구경이 아니다. 전직대통령 사법처리라는 국가적 불행을 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다시는 그런 불행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검찰이 철저하게 수사해 주기를 국민은 바라고 있다.
서울에서 몇년간 일하고 있는 한 영국 금융인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부패추방 캠페인은 노한 파도같아서 관련자들이 몸을 낮추고 파도를 피하는 식으로 넘어가곤 했는데, 이번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 검찰의 소환대상이 고위층으로 올라갔을 뿐 스타일은 전과 비슷하다. 노태우씨를 첫날 굳이 철야조사 하고, 재벌들을 조사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않은채 계속 불러들이는 것등은 사건의 본질보다 국민감정 달래기에 신경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 어마어마한 액수의 수뢰사건을 재벌 각자에 대한 단 하루 조사로 파헤칠 수 있는 유능한 검찰이 도대체 세계 어느 나라에 있겠는가』
재벌 퍼레이드가 결국은 검찰의 쇼가 아니냐는 의심은 외국인도 하고 있다. 검찰은 그 의심이 문민정부를 이해하지 못한 의심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바란다.<편집위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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