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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하고 싶은 이웃(박완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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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하고 싶은 이웃(박완서 칼럼)

입력
1995.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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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에 대학생활을 보낸 이한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최악의 정권 밑에 있다고 생각했다. 박정희정권 이상의 악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 정권을 거치고, 다음다음 정권을 지내놓고 보니 더 나빠지고 더더욱 나빠지더라는 얘기였다. 어떤 4·19세대는 이런 얘기도 했다. 당시엔 이기붕일가의 최후를 보고 인간적인 동정은 했지만, 그 밖에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는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왜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점점 더 나쁜 정권을 용납했다는 것은 우리 국민이 그만큼 점점 더 부패해갔다는 증거가 아닐까. 매일매일 TV화면을 장식하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부관리들의 면면을 보라. 그들중 유신정권, 그 다음 정권, 다음다음 정권에 충성이나 아부를 다하고, 이권에 관련되어 사법처리대상이 되는등 온갖 형태로 붙어 먹지 않은 얼굴이 몇이나 되나. 세상에 배알이 없어도 분수가 있지. 우리는 그들을 다시 뽑았고, 고위직에 앉는 것을 관운도 좋다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우린 그 정도 밖에 안되는 국민이었다. 그렇게 여러 정권을 곡예하듯이 거친 그 정떨어지는 얼굴들이 지금 머리를 맞대고, 언성을 높여가며 전직대통령 처리문제와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 그들이 현재 정말로 걱정하고 있는 게 과연 나라의 운명일까? 자파의 이익, 자신의 또 한번의 변신이나 빠져나갈 구멍일까? 어찌 부패한 국민이 아니고서야 그들을 다시 뽑을 수가 있단 말인가.

○버스대절 찾아가

어디 그뿐인가. 일껏 절로 추방해놓고 관광버스까지 대절해 줄줄이 찾아가 그 모습을 우러르며, 법문(?)까지 듣고자 할 건 또 뭐였을까. 그가 자택으로 복귀한 후 그 집을 드나들며 인사를 챙긴 고위층의 면면은 현란하기조차 했다. 우리는 그를 한시도 외롭고 쓸쓸하게 내버려두지를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진정한 반성을 어찌 바라겠는가? 으쓱해졌을테고 영화를 누릴 때와는 또 다른 자기도취를 맛보았을 것이다. 고작 그것이 국민들이 전전대통령에게 치르게 한 죄값이었다. 심지어는 그의 비리를 끝까지 싸고 돈 측근을 의리의 사나이로 기억하는 게 우리 국민이다. 암흑세계의 의리와 정권의 도덕성을 혼동하는 국민을 어찌 부패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지금 전대통령이 어떤 각오로 국민의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것인지 알만하지 않은가. 눈 딱 감고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는 계산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돈의 액수에 경악하다 못해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말도 많이 한다. 한 사람이나 한 가족의 일생계획을 위해서는 제 아무리 초호화생활을 전제로 해도 그건 욕심의 한계를 초월한 액수다. 그러나 그들이 퇴임후에는 줄창 거느리고 싶어하는 많은 무리, 수시로 달래야 하는 적들을 염두에 둔다면 많은 액수가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은 결코 혼자 몸이 아니고 거대하신 몸이다. 비만증에 걸린 사람은 보통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식사를 하는 법이다. 또한 국민경제에 미치는 생각을 해서 재벌과의 밀착관계를 밝힐 수 없다고 한 말만큼 국민의 부패를 전제로 한 발언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국민은 무엇보다 경제가 흔들리는 걸 두려워한다. 지금보다 생활수준이 떨어지느니 부도덕한 사회에 사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국민 역시 돈이, 경제가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제발 다 밝히라

그러니 제발 국민의 부패를 믿고 당신들이 주고 받은 거대한 액수의 내력을 밝히라. 그것만이 당신들과 국민이 이 치욕을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나라에 살다보니 국민 또한 각자의 그릇만큼의 비리를 저지르며 살아왔다. 그들이 몇백억원의 뇌물을 줄 때 우리는 교통순경한테 몇만원의 뇌물을 주었고, 그들이 나도 먹고 너도 먹으면서 날림건물을 지을 때, 우리는 막노동꾼까지도 몇천원을 쉽게 벌기 위해 대강 눈가림으로 일하는 재주만 발달시켰다. 그러니 누가 누굴 벌 주겠는가. 다 밝혀도 기업은 안 망할테고 전대통령을 절에도 감옥에도 안 보낼테니 제발 다 밝히라. 이대로는 정말이지 이 나라 국민으로 사는 게 너무도 치욕스러워서 안되겠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아직도 덜 썩었다는 증거다. 국민이 하루라도 덜 썩었을 때 바른 길을 찾도록 해야 한다. 국민이 아주 죽지 않았다는 표시로 준비해야 할 벌은 그의 예우를 박탈하고, 외롭고 쓸쓸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전에도 지역사회에서 사람같지 않은 짓을 한 자는 「손도 맞는다」고 해서 상대를 안하고 배척하는 풍습이 있었다. 사법처리는 면할 수 있어도 국민의 분노의 표시는 못 면하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직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비대한 몸집으로서가 아니라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싶은 이웃으로 돌아갈 것을 퇴임후의 이상으로 삼는다면, 정의로운 일을 하는데 훨씬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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