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생활 28년,6일전쟁 승리 등 신화 축적/74년 첫총리 피선 엔테베 구출작전 지휘/92년 총선때 온건표방 대팔 화해에 나서「중동평화의 순교자로 운명을 마친 위대한 전쟁영웅」
4일 암살된 이츠하크 라빈(73) 이스라엘총리의 일생은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걸어온 굴곡많은 역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싸울 때 그는 최전선에 나선 전사였고 평화를 희구했을 때는 「평화의 사도」로 몸을 불살랐다.
그는 원래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전쟁영웅이었다. 지난 22년 예루살렘에서 시오니스트 민병대(하가나)장교 아들로 태어난 라빈은 커두리 농과대학을 졸업한뒤 18세의 나이로 곧바로 군에 입문했다.
48년 독립전쟁때는 여단사령관으로 참전, 팔레스타인인들을 영토밖으로 내쫓는데 전위에 나섰다.
그후 27년간의 군생활 끝에 합참의장직에 오른 그는 67년 제3차 중동전 당시 군을 진두지휘하며 6일만에 아랍군대를 대파, 신화적 인물로 부각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라빈에게 아랍민족은 영원한 타도대상처럼 인식됐다.
그러나 라빈의 강렬한 반아랍의식은 군에서 퇴역한 68년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며 조금씩 퇴색하기 시작했다. 미국주재대사를 거쳐 73년 국회(Knesset)의원으로 당선된 라빈은 74년4월 골다 메이어총리에 의해 노동부 장관으로 첫 입각했다. 그리고 2개월뒤 메이어 내각이 제4차 중동전 와중에 무너지자 라빈은 이스라엘 최초의 본토출신 총리로 선출됐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이스라엘 특공대의 엔테베 구출작전도 당시 라빈총리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는 77년 불명예를 안고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부인 레아여사가 불법으로 미국은행에 계좌를 보유한 사실이 밝혀진 게 화근이었다.
한동안 야인생활을 하다 84년 리쿠드당-노동당 연립정권의 국방장관으로 재기한 라빈은 아랍에 대한 강·온 양면책을 적절히 구사했다. 「독수리 깃털을 가진 비둘기」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때였다.
라빈이 아랍과의 보다 적극적인 공존노선을 표방하게 된 것은 92년 총선때 였다. 대아랍강경노선을 견지해온 샤미르 당시총리에 맞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허용등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이스라엘국민들에게 화해를 촉구한 것이다. 결국 총선에서 대승하면서 총리직에 다시 오른 라빈은 중동평화를 위한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이에 따른 첫 결실이 93년9월 워싱턴에서 라빈과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장간에 체결된 팔레스타인 자치원칙선언이다. 이를 바탕으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시에서 지난해 5월부터 1단계 팔레스타인 자치가 시작됐다. 라빈은 이와함께 후세인요르단국왕과 정상회담을 갖고 46년간 지속된 양국의 적대관계를 청산했다. 중동 데탕트 시대를 활짝 연 것이다.
라빈은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아라파트와 시몬 페레스이스라엘외무장관과 함께 지난해 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라빈은 이스라엘과 역사적 공통점이 많은 한국에도 관심이 많아 67년 합참의장으로, 그리고 지난해 12월에는 총리자격으로 방한한바 있다.
중동평화의 씨를 뿌린 라빈은 결국 평화체제의 완전한 정착을 보지 못한채 눈을 감았지만 그의 숭고한 평화 정신은 항구적인 중동평화의 싹을 틔울 밑거름이 될 것이다.<이상원 기자>이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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