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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까지 퇴진시킨 지구촌 「칼날검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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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까지 퇴진시킨 지구촌 「칼날검사」들

입력
1995.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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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재워스키/“부패권력 영원할수 없다”/「워터게이트」 파문 닉슨 물러나게레온 재워스키는 현직 미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이라는 「거함」을 침몰시킨 미국 사정당국을 대표하는 칼날이다. 「워터게이트」도청사건의 특별검사를 맡아 미국 역대 대통령중 누구보다 수완이 뛰어나다는 「정치 9단」 닉슨에게 현직에서 사퇴한 유일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겨준 장본인이다.

73년 특별검사가 된 재워스키는 대통령을 둘러싼 권력의 보호막을 하나 하나 벗겨나가며 닉슨이 개입된 「검은 음모의 실체」에 접근해 갔다. 전임 아치볼드 콕스특별검사가 끝내 좌절하고만 높은 권력의 벽을 그는 사법권의 독립과 진실추구라는 두가지 신념으로 돌파해 마침내 닉슨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그가 후일 워터게이트사건을 기술한 저서 「정의와 권력」에 의하면 닉슨의 퇴진은 사법부와 입법부, 그리고 국민여론을 결집한 언론의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즉 견제와 감시기능이 엮어낸 값진 승리라는 지적이다.

1905년 텍사스주 태생인 재워스키는 뉘른베르크전범재판 검사, 케네디암살진상규명 워런위원회 고문, 변호사협회장(71∼72년)등을 거치며 오로지 「양심과 진실」만을 추구한 법조인으로 추앙받았다. 70년대 한미간 최대현안이었던 「코리아게이트」사건시 하원윤리위 수석조사관으로 박동선 스캔들을 파헤치기도 했다. 그의 충실한 후계자들은 현재 빌 클린턴 대통령부부가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화이트워터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캐고 있다.<워싱턴=이상석 특파원>

◎일 요시나가/「록히드사건」 다나카에 유죄멍에

다나카 가쿠에이(전중각영)전총리가 재임중의 뇌물수뢰로 체포, 기소된 일본전후 최대의 의혹사건인 록히드사건의 뒤에는 깐깐한 성격의 요시나가 유스케(길영우개)검사(현검찰총장)가 있었다.

당시 도쿄지검특수부의 부부장(부부장)이었던 요시나가는 록히드수사의 주임검사로서 실전부대를 일선에서 지휘했다. 지검장과 차석검사, 특수부장등 지검간부들은 그의 보고를 듣고 법률적인 판단을 내렸을 뿐이고 수사의 수순이나 체포의 결단, 조사검사에 대한 지시등은 모두 요시나가에 맡겨졌다.

검사생활 22년중 13년간을 도쿄지검 특수부에서 일해온 「의혹사건의 베테랑 」요시나가는 76년 2월4일 미상원외교위원회에서 록히드사건이 폭로되자 권력의 부패를 해부해 보고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2월하순 도쿄지검이 수사에 착수할때 그는 『전직총리라고 봐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철저히 파헤칠테니 두고보라』고 장담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는 다나카를 체포(7월27일)하기 전날에 배를 움켜잡고 귀가한후 당일 새벽4시에 복통으로 병원에 가는체하며 지검으로 달려가 체포작전을 지휘함으로써 기자들의 눈을 속이기도 했는데 매스컴의 추측보도로 수사에 지장이 생길 우려가 있을 때는 『오보를 낸 신문이나 방송과는 얘기를 하지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등 「수사제일주의」를 신조로 삼았다.

이같은 태도로 일본검찰의 상징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으나 그는 『검사에겐 공명심이 최대의 금물』이라며 스스로를 경계했다.

일본검찰의 수뇌부가 대부분 도쿄대 법학부출신이지만 요시나가는 지방의 명문축에도 끼지않는 오카야마(강산)대학출신인 것도 이색적이다.<도쿄=이재무 특파원>

◎이 피에트로/전총리 넷·의원 151명 기소

「사정의 칼날」안토니오 디 피에트로(45)전검사는 이탈리아의 뿌리깊은 정경유착 비리를 끊어낸 국민적 영웅이다. 이탈리아 사정수사「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를 주도하면서 전직 총리 4명을 포함, 상·하원 의원의 16%에 해당하는 151명을 가차없이 「법의 심판대」로 끌어냈다. 피아트, 올리베티, ENI등 이탈리아 굴지의 기업총수 등 600명의 기업간부들도 기소했다.

빈농의 아들로 31세의 뒤늦은 나이에 법조계에 입문한 그가 「칼같은 검사」로 첫 명성을 얻은 것은 뇌물을 받은 자신의 비서를 구속시키면서부터. 이후 92년2월 밀라노의 한 사회복지시설 원장으로 있던 사회당 인사를 수뢰혐의로 구속한 것을 시작으로 「마니 풀리테」에 본격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2년여간 사정수사를 지휘하며 전후 이탈리아 정치를 주도해온 기민당을 몰락시켰고 베티노 크락시전총리를 비롯한 고위인사들을 줄줄이 구속시켰다. 수사도중 권력상층부로부터 온갖 압력과 회유가 잇따랐지만 불의와의 타협을 일체 거부한 그는 반부패투쟁의 선봉자였다.<이상원 기자>

◎불 루앵베크/집권당 불법 대선자금 밝혀

프랑스에도 정권의 입김을 거부하고 썩은 권력자를 응징한 정의의 표상이 있다. 프랑스 렌 지방법원의 르노 반 루앵베크 검사(예심판사).

그는 92년 프랑스정계에 지각변동을 가져온 위르바 사건을 파헤친 장본인이다. 이 사건은 위르바라는 건설용역회사의 뇌물성 비자금이 88년 대선 당시 집권당인 사회당으로 불법 유입된 전형적인 권력형 비리였다.

일개 지방검사에 불과한 루앵베크가 집권당의 불법 정치자금 조성사실을 파헤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회당이 위르바등 수개 기업들로부터 800여만프랑(약 12억원)의 뇌물성 커미션을 받은 사실을 확인한 루앵베크는 사회당 중앙당사에 대한 초유의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그리고 당시 불법 정치자금 모금에 관여했던 국회의장을 비롯 국회의원등 40명을 단번에 기소했다. 이 스캔들의 파장으로 사회당은 93년 3월 총선에서 참패했다. 프랑스가 이후 반부패법을 제정한 것도 바로 루앵베크 검사의 저돌적인 법집행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파리=송태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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