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 분리지지표영향 자치권은 확대전망퀘벡주민의 염원인 독립의 꿈이 다시 무산됐고 캐나다는 국토분단의 위기를 극복했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투표에 의한 독립공화국이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전세계의 관심을 끌었던 캐나다연방으로부터의 퀘벡분리 주민투표는 부결로 끝났다.
캐나다 10개주중 유일하게 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퀘벡주는 80년에도 퀘벡독립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으나 6대 4로 부결됐었다. 15년만에 다시 실시한 이번 투표는 반대 50.6% 대 찬성 49.4%로 끝났다. 유권자 500만명의 82%인 410만명의 프랑스계 주민 가운데 최소한 150만명 이상이 반대로 돌아섰고 나머지 18%의 영어사용 주민이 예상대로 반대에 투표, 결국 분리주의자가 패배했다.
이번 투표는 명분(자존심)과 실리, 감정과 이성의 대결이었다. 분리주의자는 퀘벡이 프랑스의 옛 영토였음을 상기시키면서 200년전 영국에 빼앗긴 실지회복을 주장했고 연방파는 「독립은 곧 경제파국」이라며 되받아쳤다. 결국 퀘벡주민은 실리를 따라 「위(Oui)」보다는 「농(Non)」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분리주의자가 과반수에 약간 못미치는 230여만표를 얻었다는 것은 그들의 분리 독립운동이 결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분리주의자들은 패배직후 거리로 쏟아져 나와 캐나다국기를 불사르는등 불만을 발산했다.
루시앵 부샤르 퀘벡블록 당수는 개표종료직후 『우리는 패배를 인정하지만 진정한 독립을 위해 앞으로 또다른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선언, 분리운동의 새로운 시작을 천명했다. 자크 파리조 퀘벡주총리도 『소매를 걷어 붙이고 다시 시작하자.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원하고 쟁취할 수있다』며 앞으로는 헌법개정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승부가 끝난 지금 공은 장 크레티앵 연방정부총리에게로 넘어갔다. 우선 무엇보다 극도의 허탈감에 빠진 퀘벡인을 달래주어야 한다. 퀘벡과 다른 9개주, 퀘벡내의 프랑스계와 영국계, 프랑스계내의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기갈기 찢어진 캐나다를 봉합해야 한다. 퀘벡주 출신인 그는 투표후 분리주의자와 만나겠다고 약속했다. 크레티앵총리는 비록 퀘벡이 연방에 남기로 결정됐지만 우리는 변화의 욕구를 느낄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보다 큰 퀘벡의 자치를 향해 변화할 준비도 돼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분리주의자와 연방주의자는 바로 연방헌법개정 작업에 착수할 전망이다. 개정방향은 퀘벡의 자치권 확대이다. 분리주의자는 80년 주민투표에 비해 찬성쪽이 10%포인트 가까이 늘어난 것에 고무돼있고 헌법개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분리주의자는 차제에 퀘벡주내 프랑스문화를 보호하고 불어 사용 주민의 지위를 영어사용 주민과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는 것을 명문화할 계획이다. 「멋진 신세계」의 꿈은 잠시 접어 두어야 하겠지만 독립을 실현할 때까지 독립에 버금가는 실리를 챙기자는 취지이다.<이백규 기자>이백규>
◎퀘벡 분리추진 일지
▲1534=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 퀘벡 도착.
▲1759=영국, 프랑스령 퀘벡 점령.
▲1763=프랑스, 전북미 정복지를 영국에 이양(파리조약).
▲1837=프랑스 민족주의 세력, 영국 통치에 반란.
▲1867=퀘벡과 영어권 캐나다, 연방 형성.
▲1896=윌프리드 로리에, 첫 프랑스계 캐나다 총리에 선출.
▲1917=연방군, 퀘벡 반란세력 진압하고 1차 세계대전 징집 강행.
▲1968=렌 르베크, 분리주의 퀘벡당(PQ) 창건.
▲1976=PQ, 처음으로 퀘벡주 지방선거에서 승리.
▲1980=분리주의세력, 처음으로 실시된 독립찬반투표에서 패배.
▲1992=퀘벡 특별지위를 인정하는 헌법협정안 합의했으나 의회에서 부결.
▲1993=연방 총선실시. 분리주의당 퀘벡 블록(BQ), 퀘벡에서 승리로 캐나다 연방의회에 진출.
▲1994=자크 파리조, 퀘벡주 총리로 선출. 퀘벡주 분리투표 공약.
▲1995.9=파리조 주총리, 10월30일에 독립에 대한 퀘벡주민 투표 실시 결정.
▲1995.10.30=퀘벡주민 투표실시. 분리주의세력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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