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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권력 미·일서는 발 못붙인다/닉슨­다나카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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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권력 미·일서는 발 못붙인다/닉슨­다나카의 말로

입력
1995.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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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압력불구 검찰 전격 체포·기소/부인·은폐·사과·사임 전형적 몰락과정▷다나카 전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전중각영)전일본총리가 록히드사건 관련혐의로 전격체포·기소된 것은 일본검찰이 「만인은 법앞에 평등하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다. 76년 7월26일 도쿄(동경)지검 특수부의 마쓰다 노보루(송전승)검사(현 법무성 교정국장)가 다나카를 그의 집에서 체포, 연행해 오자 다카세 레이지(고뢰찰이)지검장은 『전총리를 이런 식으로 뵙게 돼 유감입니다』라고 인사했다. 다나카가 『과거에 전직총리가 체포된 적이 있느냐』고 묻자 다카세지검장은 『총리재임중의 사건으로 체포된 것은 처음』이라고 알려줬고 다나카는 『그런가』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체포직후 후세켄(포시건)검찰총장은 정치권의 압력을 무릅쓰고 엄정한 수사를 펼치겠다는 검찰의 의지를 표명하면서 『모든 책임은 내가 질테니 부패권력과 결사적으로 싸울 각오를 하라』고 특수부 검사들을 독려했다. 검찰이 정치권력에 도전할 의사를 굳힌 것은 언론과 국민여론 때문이었다. 미상원 외교위원회에서 록히드사 간부가 뇌물제공사실을 실토한 후 일본의 노조단체들은 연일 규탄데모를 벌였고 언론도 다나카의 부도덕성을 집중보도하며 검찰의 엄정수사를 촉구했다.

정계와 정부 일각에서는 『미상원 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소위에서 록히드사 간부가 증언한 것은 일본의 법체계상 증거능력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검찰은 록히드사측의 증언을 얻기 위해 록히드사 관계자에 대한 「불기소 선언」까지 감수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외국인이라고 해서 용의자를 체포치 않겠다고 약속한 것은 일본 사법기관의 수치』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으나 당시 일본의 국민감정은 다나카를 처벌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조치라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다나카의 체포후 과연 그가 기소될 것인가 하는 것이 국민들의 관심사였으나 도쿄지검특수부는 『다나카가 범죄사실을 부인하더라도 빠져나갈 수 없게 돼 있다』고 자신하며 기소했고 검찰의 예상대로 다나카는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했지만 결국 유죄판결을 받고 말았다. 일본의 전후 최대의혹사건이었던 록히드사건은 일본검찰이 국민 여론에 따라 정계의 최고 실력자를 법으로 다스린 쾌거로 기록되고 있다.<도쿄=이재무 특파원>

▷닉슨 전 대통령◁

리처드 닉슨전미대통령의 사임은 여론과 법이라는 「민주주의적 압박」에 의해 부정직한 최고권력이 벼랑 아래로 추락해 간 대표적 모습이다. 72년 대선과정에서 현직 대통령이던 닉슨후보측이 상대(민주당)후보의 선거본부가 있는 워터게이트빌딩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 했던 「워터게이트사건」.

이 사건 진행과정에서 닉슨은 분노를 가장한 부인―은폐·축소로 일관한 수습 시도―법과 여론의 총체적 압박―대국민 사과성명―사임으로 이어지는 「부정직한 권력의 전형적 몰락 과정」을 밟아 갔다.

대선 직전 이 사건이 처음 언론에 보도되자 닉슨은 『조잡한 저널리즘』이라고 분노했고 백악관측은 명예훼손이라며 소송까지도 검토한다는 기세였다. 그러나 워터게이트빌딩에 침입했던 하수인중 1명이 「상부와의 관련」을 폭로하자 닉슨은 측근보좌관을 해임하면서 사건의 은폐를 시도했다. 이어 상원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닉슨의 측근들이 「비밀공작」을 시인하면서 사안은 끝내 「사법처리」의 국면으로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닉슨이 재선에 성공한 이후 사건을 은폐·축소하기 위해 측근들과 모의를 했으며 이때의 대화가 녹음된 테이프가 있음이 밝혀진 뒤에도 닉슨은 관련자료의 일부만을 공개하면서 『더 이상은 없다. 국민에게 미안하다』는 사과성명으로 버티려 했다. 그러자 사건을 담당한 특별검사와 상원특별위원회는 대통령이 관련자료 전부를 제출토록 해줄 것을 연방대법원에 요청했다.

74년 7월24일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대통령은 그의 정치적 신념에 따른 정책결정을 보호받을 권한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형사사건에 있어서는 「보다 높은 차원의 요구」가 있을 수 있으며 이 경우 대통령은 통치행위라 할지라도 검찰의 증거제출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흘후 상원 법사위는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탄핵이유는 「도청」이 아니라 「대통령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방해했다」는 것이었다. 닉슨은 74년 8월9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국가이익에 도움이 된다』며 백악관을 떠났다.<워싱턴=정병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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