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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인 변방의 「한때 내가 잡은 고래」/황현산 고려대교수(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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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인 변방의 「한때 내가 잡은 고래」/황현산 고려대교수(시평)

입력
1995.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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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변두리와 서울의 변두리울산의 시동인 「변방」이 그 열한 번째 동인지 「한때 내가 잡은 고래」를 펴냈다. 거기 시를 싣고 있는 강세화 문영 박종해 신춘희 이충호 최일성등 여섯 시인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차분하다. 「변방」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 차분한 목소리는 울산으로보다는 울산공단으로 알려진 한 도시의 유일한 문학적 선택일까. 그렇다면 이 나라 문화생산의 거의 모든 수요·공급의 질서를 장악하고 있는 서울의 선택은 무엇일까.

박종해가 「함월산 함월산/나는 힘이 없다/속수무책이다」라고 한탄할 때의 이 무기력은 곧바로,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들어도 속수무책인 서울의 무기력이다. 강세화가 「나날이 힘차게, 새롭게, 즐겁게 사는 법을 아는가」라고 물을 때의 이 희망은 서울의 문학이 항상 내걸면서도 동시에 포기하는 희망이다. 「나로 인해, 내 시는/50전에, 중년늙은이가 다 됐다」고 신춘희는 말하는데, 서울의 시도 한때 소란을 떨고 나면 늙는 차례를 더 빨리 배당받는다. 「저 해거름의 산들/희미한 막사 뒤로/낯선 바람이 형편없이 불었어요」라고 이충호는 한 여공의 말을 전한다. 서울의 시는 자주 여공의 편에 서지만, 이 시인처럼 그녀와 같은 시선을 갖는 일이 쉽지 않다. 「수도꼭지에 입을 대어 물을 마시다가/나는 문득 이 수돗물이 아내의 근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최일성은 쓴다. 서울의 시인도 자신이 쓰는 시를 자기 생존과 관계지어 주는 일에 항상 행복하지 못하다. 울산의 시인 문영이 「자기가 낸 상처가 아니라면/산이 어떻게 길을 열겠는가」라고 물을 때, 서울의 시인도 항상 제 상처에 의지하여 새 지도를 만든다. 그 둘은 모두 변방에 산다.

서울은 울산과 무엇이 다를까. 다른 것이 있다면, 서울은 서울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 아마 그것이리다. 다시 말하자면 제 삶이 비록 변두리를 살고 있지만, 그것이 곧 중심을 사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기회가 서울의 시인에게는 더 많이 주어진다는 것, 아마 그것이리라.

시는 변두리를 위한 말이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깊고 낮은 모든 형편들이 동일한 발언권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시를 쓰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형편과 그 진실이 세상의 논리에서 아직 제 자리를 얻지 못한채 변두리에 놓여 있다면, 새로운 언어를 자처하는 시가 말해야 할 것은 그것이기 때문이다. 변방은 표현된 것과 표현되지 않은 것의 경계이며, 세상의 모든 동네가 삶의 중심으로 될 때까지, 시의 땅이다.<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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