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리처드 솔로몬 저 「전환기의 정의」 요약과거 역사의 잘못을 밝혀내고 청산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과거청산문제가 역사의 전환기이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가장 중대한 문제로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유수의 공공 정책연구소인 「평화연구소(소장 리처드 솔로몬 전국무부 동아태 담당차관보)」는 최근 세계 각국의 과거청산 사례를 다룬 「전환기의 정의」를 펴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연구서는 모두 3권, 2,348쪽의 방대한 분량으로 제1권은 과거청산문제에 따르는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관점 등을 다루고 있으며 제2권은 각국별 청산사례, 제3권에는 과거 청산과 관련된 판례, 법령등을 수록하고 있다. 한국에 관해서도 반민특위 구성과 부정축재자 처벌문제등이 34쪽에 걸쳐 소개돼 있다. 노태우전대통령의 천문학적 비자금조성비리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참고자료로 삼기 위해 본사 이상석 워싱턴 특파원이 긴급 입수한 이 연구서를 요약, 소개한다.<편집자 주>편집자>
◎정치범·부패인물 청산사례/나치협력자 40여만명 대숙청프랑스/프랑코체제 관료 해고뒤 복직스페인/독재자 차우셰스쿠 공개처형/루마니아/군사정권 공무원 10만명 해고/그리스
프랑스는 1944년 나치에서 해방된후 나치와 협력한 비시정권의 추종자들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대량검거 선풍이 불었고 독일군과 성관계를 가졌던 여성들은 삭발을 당했다. 즉결처형도 있었다.
전후 모두 40여만명이 직간접으로 대숙청의 영향을 받았다. 해방후 50년이 지난 지금도 숙청의 후유증은 남아있다. 78년에는 「추방된 자녀들의 위원회」가 발족돼 아직도 비밀로 남아있는 정부기록의 공개와 전범자들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92년말에는 프랑스 국립문서 보관소의 전범기록이 해외로 유출돼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
여기에는 프랑스정부가 2차대전 기간에 수천명의 시민을 감금하고 유대인 7만5천명을 나치의 사형장으로 압송하는데 협조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비시정권하의 관리 몇명에 대한 형사고발사건은 현재도 당국의 수사대상이 되고 있다.
반면 스페인의 경우에는 프랑코 독재체제의 청산이 비교적 순탄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 졌다. 프랑코 시절의 고위관리들이 해고되기는 했으나 대부분은 펠리페 곤살레스총리 밑에서 과거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했다. 프랑코시대의 경찰기록들도 현재까지 미공개된 상태로 남아있다. 76년 후안 카를로스국왕은 테러 관련범을 제외한 다수의 정치범에 대해 국왕직권으로 사면조치를 취했다. 77년 새로 선출된 의회도 모든 정치범에 대한 사면을 추인했다.
스페인과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경우는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전대통령 공개 처형이었다. 이 장면은 전세계의 TV를 통해 방영됨으로써 새 정부의 신망을 실추시켰다.
아르헨티나와 그리스는 우익군부가 대규모 인권유린을 자행하며 철권통치를 펼쳤고 경제발전을 공약했으나 실패, 결국 군사도발(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전쟁, 그리스는 키프로스전쟁)끝에 몰락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두나라 모두 비교적 군부독재기간이 짧아 「깨끗한 손」을 가진 사람들을 선별해 때묻은 관료조직을 대체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카라만리스대통령은 군사정권을 인수한 즉시 대규모 공무원 숙청을 단행했다. 군부는 물론 하위직 공무원을 비롯한 각급 정부기관과 국가단체의 임직원 10만명 이상을 해고하거나 교체했다. 과거 정권과 연계된 관변단체도 해산했다. 그의 재임 6개월만에 1백여명의 전직관리들이 67년의 쿠데타에 관련된 혐의나 피의자 고문혐의등으로 기소됐다.
그는 이와 함께 군경의 고문, 사찰기록을 이용해 피해자 보상 및 복권조치를 단행하는등 74∼75년 두해동안 전광석화처럼 과거청산을 매듭지었다.
한편 그리스정부는 90년 「인도적인 이유에서」 3명의 전 군사정부 지도자와 10명의 전직 장교에 대한 사면령 계획을 발표했다가 국민의 강력한 항의로 이를 백지화하기도 했다.
◎부패정권 관료 등 인적청산 초점/“단호단죄” 하거나 “사면통한 화합”/집권자 재산 몰수·피해자엔 연금
○과거청산 딜레마
세계각국의 과거청산 작업은 나라마다 상황은 달라도 과거 정권에 봉사했던 고급 공무원, 관료, 군경등 관련자들에 대한 인적청산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과거청산에 나선 국가들은 과거의 통치를 정당화하지 않는 동시에 마녀사냥식 보복을 허용해서도 안된다는 고민을 안고 있다. 청산작업은 흔히 「승리자의 정의」가 되기 쉽다. 새로운 집권세력이 과거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켜야 하는 부담을 지고 있는데다 권위적인 정권밑에서 봉직했던 인물들에 대한 즉각적이고 가혹한 보복을 촉구하는 여론이 일기 쉽기 때문이다.
○인적 청산
독재자나 그 하수인의 처벌은 정의확립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신·구 양정권간의 차별화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형사처벌에 의한 단호한 단죄냐, 처벌보다 사면조치를 통한 화합이냐는 어려운 선택이다. 군사정권이 몰락한지 20여년이 되는 그리스에서는 과거 군부지도자들을 석방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항의시위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이에 반해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는 중대한 인권침해를 저지른 주범들에 대한 재판을 둘러싸고 군부의 노골적인 위협이 가해지기도 했다. 남아공에서도 94년 인종차별 철폐이후 사면문제가 만델라정권을 위협하는 요인이 됐다.
국제사회의 공통된 여론은 학살이나 고문등 무자비한 인권유린이나 국제법위반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대폭 사면은 허용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형사처벌을 할 경우 제기되는 미묘한 문제중 하나는 공소시효 만료여부다. 헝가리와 체코에서는 과거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현정부의 처벌은 적법하다는 이론이 제기됐다. 결국 최종판단은 헌법재판소로 넘겨졌는데 체코 헌법재판소는 공소시효를 연장, 구 정권이 저지른 범죄를 처벌해야 한다고 판시했으나 헝가리 헌법재판소는 반대로 이를 기각했다.
과거 정권의 상층부 인사들에 대한 처벌범위와 상급자의 명령을 이행한 하급관리나 군인들을 어느선까지 처벌하느냐 하는 문제도 쉽지 않다.
91년 구 동독에서는 과거 서독으로의 탈출자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집행한 젊은 군인 수명이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러자 사살명령을 내린 자들은 가만히 두고 「쉬파리」 몇명만 잡아 넣었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결국 7명의 구동독 관리들이 추가로 기소됐다. 르완다의 경우 50만의 양민을 학살했던 정권이 물러간뒤 그같은 행위에 가담한 자들을 모두 계산해보니 3만∼10만명에 이르렀다.
과거 독재 정권에 충성을 바친 사람들을 공직에서 추방하지 않으면 국민신뢰 회복이 어렵다. 게다가 압제정권의 기관차 역할을 했던 인물들을 현직에 있게 하는 경우 개혁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독재가 지속된 나라일 경우 대부분의 「협력자」들이 국가운영의 경험이나 노하우를 가진 사람들이어서 이들이 사라지면 하부구조가 휘청거릴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폴란드에서는 91년 여론조사 결과 과거 공산정권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솎아내는 제도를 만들자는데 찬동한 사람이 38%에 지나지 않았다. 그뒤 92년 3월 재조사한 결과 지지도는 64%로 껑충 뛰었다.
이같은 현상은 민주혁명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사유화 작업과 부의 재분배과정에서 과거 공산당관리들이 공금을 횡령하거나 국가재산을 빼돌리는등 특혜를 받았을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에서는 과거 공산당원이었던 사람들의 투표권을 박탈했다. 이같은 공민권 박탈은 2차대전 직후 노르웨이에서도 있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과거의 집권당이나 이를 승계한 정당의 활동이 정지되기도 했다. 보리스 옐친러시아대통령은 공산당의 활동 금지령을 내리고 자산을 몰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문제는 헌법재판소로 비화돼 어중간한 상태로 결말이 났다.
○피해자 보상
독재정권이 추방되더라도 그같은 과거를 감싸려는 세력은 여전히 남는 법이다. 이를 적절히 다스리지 못하면 새 정부의 권위가 위협받을 뿐 아니라 과거로 회귀하려는 세력들의 입지를 강화해주게 된다.
독재의 피해자들에게 가장 광범한 보상 및 복권조치를 취하고 있는 나라는 칠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집권시 옥사한 사람들의 유가족에게는 평생 연금이 나온다. 생존 피해자들에게도 징역살이동안 수입 손실액을 보전해주며 그와 가족들에게는 무료교육과 의료보험 혜택과 함께 병역마저 면제해준다.
독재체제 지도자들은 종종 국가의 자원을 횡령한다. 이같은 자금을 몰수, 전환기의 정의확립에 소요되는 자금으로 충당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필리핀에서는 마르코스부부의 해외 은닉재산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진행중이고 알바니아에서는 과거 집권세력의 재산을 몰수했다.
한가지 흥미있는 일은 폴란드정부가 과거 공산당원이었던 사람들에게 부과하려는 「특별세」 이다. 과거 공산당원들에게 당시 직급에 따라 세금을 차등 부과해 피해자들의 재산상 손실을 보전하는 자금으로 사용하려는 것이다.<정리=이상석 워싱턴 특파원>정리=이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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