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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자 산성(한문화 원류기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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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자 산성(한문화 원류기행:2)

입력
1995.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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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요새엔 옛기상서린 연병장터/외국인 통제지역 「발해고묘군」 표석 모두 뽑혀 나뒹굴어발해국의 첫 수도였던 둔화지역에는 오동성과 육정산 발해고분군, 성산자 산성이 삼각형을 이루어 자리잡고 있다. 발해고분군은 3대 문왕의 둘째딸 정혜공주의 묘가 발견된 지역으로 발해문화를 연구하는 이정표가 되는 곳이다. 성산자산성은 평지에 쌓은 오동성과 한 조를 이루는 방어산성으로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밝혀주는 주요 유적이다.

그러나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왕국의 비밀을 풀어준 두 유적지는 현재 외국인접근금지구역으로 묶여 있다. 최근 한국에서 고구려와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현지에서 「영토회복」시위까지 벌어지자 중국정부가 외국인의 출입 자체를 봉쇄해버린 것이다.

둔화시로부터 남동쪽으로 7쯤 떨어진 육정산 고분군을 찾아가는 동안 위진원 둔화문물연구소장은 잔뜩 긴장되어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그는 『이 지역을 외국인에게 공개하는 것 자체가 위법이지만 풍경스케치만을 전제로 허용한다』며 『절대 사진찍지 말고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전세버스를 타고 움푹움푹 파인 비포장도로를 따라 20분쯤 달리니 육정산이 나타났다. 평지에 가까운 야산지대에 솟은 육정산은 이름 그대로 여섯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서쪽에서 두번째 봉우리가 해발 609의 주봉이며 다른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정혜공주의 혼을 지키고 있는 듯 했다. 산 아래쪽으로는 10여개의 양어장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고 주변에는 땅을 파헤친 후 쌓아 놓은 흙더미가 그대로 있었다. 위소장은 『2∼3년전부터 성정부가 이 지역을 관광지로 개발하다가 중앙정부가 통제구역으로 설정하면서 공사가 중단됐다』고 말했다.

고분군 입구의 「제이묘구」라고 쓰인 돌기둥에서 공주묘의 비석이 있는 곳까지 좁은 길을 따라 걸어오르던 일행은 놀라운 현장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길 양쪽에 늘어서 있던 「발해고묘군」표석이 모두 뽑혀져 나뒹굴고 「육정산고묘군」이라는 표석이 대신 자리잡고 있었다.

혹시 발해의 유적이라는 사실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비석이 침식돼 부서진데다 발해라는 지명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아 93년부터 교체했다』는 위소장의 변명이 그런 생각을 더욱 짙게 했다.

산모퉁이를 돌아 후미진 곳에서 만난 공주무덤의 비석주변도 질척거리는 습지대로 변한채 잡초가 에워싸고 있었다. 50여기의 다른 무덤과 함께 49년에 발견돼 발해초기 도읍지라는 사실을 입증해준 유적지가 형편없이 방치돼 있는 것이다.

심란한 마음인채 일행은 성산자산성으로 향했다. 육정산에서 동북쪽으로 5, 오동성에서 서남쪽으로 3 떨어진 성산자산은 대조영이 정착해 처음으로 성을 쌓았다고 전해지는 동모산으로 알려져 있다. 산의 동쪽과 북쪽은 무단강과 천애의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요새이다. 그 산 위에는 연병장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성산자산성 스케치계획은 위소장의 강력한 제지로 무산됐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산성근처 성산자촌에서 산을 응시하던 일행은 성벽의 흔적만 멀리서 확인한 후 내쫓기듯 떠나야 했다.

조선족안내원은 돌아가는 차안에서 『중국은 발해가 당왕조에 예속돼 있었으며 속말말갈을 주체로 건립된 지방민족정권으로 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최진환 기자>

◎발해사 연구/이승휴 「제왕운기」서 처음 서술/현장조사 잘안돼 중·일에 뒤져

발해는 사료가 될만한 자체 기록이 없는데다 거란에 의해 멸망한 후 계승국가가 없어 역사연구에 한계를 지니고 있다.

국내에서의 연구는 고려때 이승휴가 「제왕운기」에서 발해사를 고구려사의 연장으로 본 이래, 유득공 정약용 등이 한국사의 일부로 서술했다. 그러나 아직도 유적발굴은 물론 현장조사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중국 북한 일본에 비해 연구에서 뒤지고 있다.

송기호 서울대교수의 자료에 의하면 94년 전반기까지 발해와 관련된 1,526편의 논문 중에서 중국이 687건으로 45%, 일본이 360건으로 24%, 한국은 247건으로 16%에 불과하다. 그나마 국내논문은 절반이상이 90년이후 발표됐다.

국내의 발해사박사는 한규철 경성대교수와 지난 2월 「발해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국가위상」이라는 논문으로 서울대에서 학위를 받은 송기호교수 둘뿐이다. 최근 출간된 서적은 한교수의 「발해대외관계사」(신서원간), 송교수의 현장답사기를 모은 「발해를 찾아서」(솔간)가 있고 송교수가 박사학위논문을 보완한 「발해정치사연구」가 곧 나온다.

송교수는 『국내 발해사연구는 통일신라시대사에 포함시킨 부수적 연구가 주류였고, 실증적 차원에서 우리 역사의 일부로 입증하려는 노력도 부족했다』고 말하고 있다.

◎작가메모 구자승씨

성산자산성은 멀리서도 그 위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좌우 2, 높이 1∼2의 성터가 수천평의 옥수수밭 너머로 선명히 보였다.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그 곳을 가까이서 그리려 했으나 접근하지 못해 근처마을에서 소재를 찾았다. 100호가량의 농가로 이루어진 마을은 60년대 우리의 모습이었다. 몇대에 걸쳐 살아온 듯한 허름한 집과 주변의 나무를 양쪽에 배치하고 한가롭게 노니는 닭으로 작품의 포인트를 삼았다.

□약력

▲41년 서울출생 ▲홍익대 서양화과와 미술교육대학원, 온타리오 미대 ▲국내외 개인전 5회 ▲상명여대 교수. 한국인물작가회회장. 신미술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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