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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화」의 악순환/김병국 고려대 교수·정치학(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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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화」의 악순환/김병국 고려대 교수·정치학(한국논단)

입력
1995.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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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아끼는 대통령이라고 자부하던 그였다. 그러나 권좌에서 물러나자마자 멕시코의 살리나스는 기피인물로 전락하였다. 세계무역기구의 초대 사무총장으로서 화려하게 퇴임 이후의 삶을 살려던 야심은 페소화의 폭락과 함께 무너졌고 테러와 부정비리에 대한 의혹은 그를 망명의 길로 내몰았다.그러나 전직 대통령이 이처럼 세인의 경멸 속에 추락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파멸의 정치는 오히려 멕시코에서 하나의 「전통」이 되어 버린지 오래였다.

○멕시코의 「전통」

문제는 「체제」였다. 독재하에서 대통령은 마음껏 치부하다 임기 중반부터는 기이한 처신술로 퇴임 이후에 대한 보장을 받아내려 하였다. 후계논의의 조기 공론화를 불허하여 측근 사이에 충성심경쟁을 유발하다 임기 막판에 가서는 하나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게임이 그것이었다. 측근은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공명선거가 아니라 전임자의 배려와 독재의 관권및 금권정치 덕택에 권좌에 오른 후계자로서는 최대의 과제가 전임자의 명예 보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존이었다. 통치자로서의 정당성은 형식적인 대선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취임 이후의 정책에 대한 국민의 평가에서 판가름나기 때문이었다.

악순환은 여기서 일어난다. 후계자가 과거와의 차별화를 부정하기에는 전임자가 저지른 부정비리의 폐해가 너무나 컸고 국민의 인내심을 역설하기에는 후계자 자신의 권력기반이 취약하였다. 멕시코의 후계자는 오히려 전임자의 부정비리를 파헤치면서 홀로서기를 단행하였다. 그러다 임기가 다하면 그 역시 자신의 측근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차별화의 정치에 희생당하였다.

우리의 과거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출범할 때부터 온갖 원한을 사고 정통성의 위기에 시달린 5공은 역시 멕시코식 처세술로 퇴임 이후에 대한 보장을 받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부정축재자의 명예는 후임자가 보호할 길이 없다. 학창시절부터 동고동락을 해온 동기생이 후계자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서 역사가 전임자의 편의에 따라 쓰여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후계자는 전임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할 형편이고 그러한 취약한 권력기반은 차별화의 정치를 낳는다.

○고리를 끊을 기회

하지만 한국은 멕시코와 달리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화라는 개혁정치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만만치 않지만 공정한 선거를 통해 등장한 문민정부의 정통성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아울러 취임하자마자 정치자금의 수수를 거부한 문민정부이기에 「1997년 이후」를 걱정해야 할 까닭이 없다.

멕시코와의 차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문민정부는 후계자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지난 지방선거 이후의 최대 관심사는 오히려 다음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재현되느냐 「한 지붕 세 가족」의 민자당이 분당의 위험없이 총선을 치를 수 있느냐이다. 게다가 「후계자」라는 말 자체가 어색하리 만큼 성장한 것이 한국인의 시민정신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후계자를 지목하는 것에 대한 최대의 반론은 역시 그 무익함에 있다. 국민에게 자격을 검증받지 않은 함량미달의 정치인까지 차기를 준비한다면서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경쟁에 나서게 되고 너나 할 것 없이 밀실에 숨어 흑색선전에 가담하고 세를 모을지 모른다. 대통령은 그러한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의 권력누수에 대처할 길이 없다. 반면에 국민은 대권주자를 검증할 기회까지 박탈당한다. 권력누수의 단속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채 국민의 알 권리만을 빼앗아가는 것이 멕시코식 후계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일까. 후계자를 걱정할 이유가 없고 차기 대권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는 상황 역시 아닌 문민정부가 무익한 후계논의에 휘말렸다. 지난달에는 개혁의 계승을 후계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조기 공론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대통령의 회견 소식이 전해졌고 이달 중순에는 「놀랄만한 후보」를 내세워 세대교체를 성사시킨다는 의지가 천명되었다. 그러다 사흘만에 대통령은 「정상적 절차」에 따라 여당의 차기 후보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비판적 여론의 진화에 나섰다.

○최선의 후계전략

다행한 일이다. 개혁과 권력은 계승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측근이 정적 보다 낫다는 철칙 역시 정치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최선의 「후계」전략은 차기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에 충실하면서 청렴한 이미지를 지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차기 대권을 차지하건 간에 개혁의 정신은 계승되고 차별화정치의 악순환은 끊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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