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상도 남의 잔치로 끝났다. 1백만달러(약7억8천만원)라는 상금은, 한 해에 1억달러도 더 버는 갑부들이 세계에 있고 보면 대단한 액수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구나 공동수상하면 상금을 나눠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의 권위는 상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상금보다 권위에서 노벨상의 영광은 살아 있다.노벨상을 분석해 보면, 왕왕 시류를 타는 평화상이나 문학상을 빼고, 이학부문에서는 언제나 인간과 자연의 궁극을 파헤친 연구에 평가의 역점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의학상은 태아발달과정에서의 유전자 통제, 물리학상은 물질의 기본인 소립자, 화학상은 오존층의 생성과 파괴에 대한 각각의 연구에 주어졌다. 모두 수십년간의 연구결정이다. 반핵운동을 펼쳐 온 퍼그워시회의(1957년 시작)와 주역 로트블라트에 준 평화상도 올해는 그랬다.
일본은 8명이나 탄 노벨상을 한사람도 받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기초과학을 육성하자는 의견이 나온다. 세계적 규모의 기초과학연구소를 설립하자든가, 문학상을 위해서 로비활동을 벌이자는 의견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과학기술처는 기초과학발전을 위해 내년 고등과학원과 아태이론물리센터를 열어 세계석학의 영입을 계획하고, 많은 노벨상수상자를 낸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의 서울분원을 유치하려고 한다. 현대전자는 작지만 노벨드림상을 만들었고 파스퇴르유업은 민족사관고교를 세워 노벨상의 비원을 이루려고 한다. 뜻깊은 일이다.
그러나 어떤 연구소의 목표가 수상이 될 수는 없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노벨상을 목표로 연구하지 않았다. 덤으로 탔을 뿐이다. 그것은 메달이 국민체육의 목표가 아니며 국회의원 금배지가 정치의 목적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가시적이고 실리적인 목적에 앞서 구경을 탐구할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문학에선 인간의 마음과 사회에 대한 제한없는 천착을 포함하여….
모든 분야에서 포말은 늘 생기고, 또 가라앉는다. 그 거품밑 깊숙한 곳에서, 인간과 그 주변의 변하지 않을 진리를 탐구하여 인류사회에 기여하는 것에 학문의 목적이 있음을 노벨상은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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