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잡으면 좀체로 놓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그래서 큰 자리든 작은 자리든 한번 차지하면 되도록 오래 앉아 있고 싶어하는 것이다. 특히 정치권력의 경우는 그런 증상이 심하다.한국에 있어서 정치는 마약과 같은 중독성을 지니고 있다. 선거에서 몇번씩 떨어지고도 계속 도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육신이 기동할 수 있는 그때까지 중독성 환자처럼 덤비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의 정치풍토였다.
그런 풍토가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다가 보니 우리 정치판은 지나칠 정도로 각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발적인 퇴진이란 눈을 씻고 보아도 구경할 수가 없고 불가항력적이고 불가피한 사정에 부딪쳤을 경우에나 마지못해 퇴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후진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세대교체를 위해 자진해서 떠나는 정치인은 보기 드물었다.
그런데 최근 지역구 출신의 몇몇 현역 의원들이 선거를 반년여 앞둔 시점에서 불출마 선언을 해 주목을 끌고 있다. 민자당에서 나웅배 박경수 안찬희 의원이 내년 선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데 이어 자민련의 유수호 의원도 23일 이번 임기만 끝내고 정계를 떠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이처럼 지역구를 가진 여야의원들이 임기(96년5월29일)를 열달 가까이 남겨두고 은퇴선언을 하는 전례는 일찍이 없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은퇴이유는 개인사정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 정치환경에 환멸을 느껴 더 이상 정치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이만하면 할만큼 했으니까 물러난다」는 사람도 있다. 내년 선거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일찌감치 물러나는 실속파도 있겠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물고 늘어져 보겠다는 극성파에 비하면 확실히 진일보한 처신이다.
이들의 조기은퇴선언은 우선 각박한 정치판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안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갈 데까지 가보자는 정치인들의 일반적인 속성은 정치판을 거칠고 어지럽게 만든다. 원칙도 기준도 없는 혼란의 도가니로 만드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정치를 방해하는 것이다.
이들의 불출마선언은 안정된 세대교체의 길을 미리 열어 준다는 의미에서도 평가받을 만하다. 한국의 정치발전을 위해 자신이 기여할 것이 별로 없다고 판단되면 깨끗이 퇴장하는 것이 보기에도 산뜻하다.
그리고 그들이 퇴장의 명분으로 내세운 정치환경의 환멸에 대해서는 우리국민이나 정치인이 다 함께 생각해야 할 문제다. 실망보다 희망을 갖게 하는 정치환경을 만드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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