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방한때 국민결집방안으로/83년 한일정상회담 교량역할도5공화국 초기 한국을 극비리에 왕래하면서 교과서파동등으로 극히 나빠진 한·일 양국관계 회복을 위해 밀사로 활동했던 일본의 세지마 류조(뇌도룡삼·83) 이토추상사 특별고문이 22일 회고록 「이쿠산카(기산하)」를 펴냈다.
세지마고문은 이 회고록에서 5, 6공 기간에 자신이 수행했던 밀사역할과 88올림픽과 관련한 비화, 83년 한·일정상회담의 뒷얘기등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신군부가 대두한 80년 3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로부터 『전두환 노태우 두장군을 만나 격려와 조언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고 일본상공회의소 회장 고토 노보루(오도등)와 함께 그해 6월과 8월 두차례 방한했다. 첫 방한때 전장군은 한국내 정세등을 설명하면서 국민결집방안과 경제활성화방안의 아이디어를 물었다. 두번째 만난 자리에서 고토가 일본의 경험에 비추어 올림픽이나 박람회등을 개최할 것을 조언했다. 고토는 귀국후 당시 올림픽 개최지 유치신청을 한 나고야(명고옥)시에 한국의 유치노력에 반대하지 말도록 막후에서 노력했고 결국 한국은 올림픽 개최에 성공했다.
교과서파동으로 한·일관계가 경색돼 있던 82년1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중증근강홍)총리는 취임 직후 세지마에게 한·일관계 정상화의 교량역할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나카소네총리로부터 경제협력에 관한 양국 협상내용을 들은 뒤 일제시대부터 알고 지내던 권익현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과 부산에서 비밀리에 만나 경제협력과 관련해 엔차관 18억5천만달러, 수출입은행 융자 21억5천만달러와 기간 7년, 금리6% 조건에 합의했다고 회고했다.
협상에 성공한 뒤 세지마는 전두환대통령에게 나카소네총리의 친서를 전달했으며 이 친서는 이듬해인 83년초 나카소네가 전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노대통령 취임직후 단독으로 만나 대통령선거가 국가의 에너지낭비인만큼 헌법을 개정, 내각책임제를 추진할 것을 조언하기도 했다. 여러차례 가진 회식자리에서 노대통령이 일본의 엔카(연가)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를 일본어로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73년에는 김종필 당시 총리로부터 수출 1백억달러와 국민소득 1천달러를 달성하기 위한 방책을 알려달라는 전갈을 받고 2개월후 만나 일본처럼 종합상사를 육성토록 충고했다고 회고록은 기술하고 있다.
그는 1945년 관동군 참모로 소련과 정전교섭을 하다 포로가 돼 시베리아에서 11년간 억류생활을 했다. 귀국후 이토추상사에 스카우트돼 경영수완을 발휘, 회장까지 지낸 의지의 사나이로 정부의 행정개혁등 공무에도 적극 관여해 「쇼와(소화·히로히토 전 일왕의 연호)의 참모」라는 별명을 얻는 등 배후 조종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한·일관계가 교착될 때마다 밀사로 활동했으며 일본에서 널리 읽혀진 소설 「불모지대」의 실제모델로도 유명하다.<도쿄=황영식 특파원>도쿄=황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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