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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호 열차/문창재 정치 2부장(데스크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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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호 열차/문창재 정치 2부장(데스크 진단)

입력
1995.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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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온 교포학자 한사람이 통일호 열차를 탔던 경험을 말하면서 「통일」이란 이름을 가진 열차가 그렇게 푸대접을 받을 수 있느냐고 혀를 찼다.정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으로 남북관계가 전공인 그는 서울에서 열린 회의참석차 귀국, 지방에 갈 일이 있어 통일호를 탔다가 크게 실망했다고 말했다.

『통일호란 열차가 있어 반가운 마음에 타보니 가다가 서고 가다가 쉬고 하는 60년대 완행같은 열차같아요. 그런 열차에 왜 하필 통일호란 이름을 붙였을까요. 느린 것은 그렇다 치고 객차는 왜 그리 지저분한지…. 일행인 독일사람들에게 부끄러워 얼굴이 뜨거웠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국민 애창곡인 나라에서 통일이란 이름을 가진 열차가 그 꼴이니 말이 되느냐는 그의 개탄은, 실체는 없이 구호 뿐인 우리의 통일정책과 통일호의 꼴이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일깨워주었다. 그래서 철도청에 알아보니 통일호의 역사는 오욕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통일호가 태어난 것은 자유당 시절인 55년 8월이었다. 서울―부산을 7시간에 주파하는, 당시로는 최고속 최상급 열차에 통일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서울―평양 서울―청진까지 그렇게 달려가자는 민족의 염원을 담은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통일호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5년후인 60년 통일호란 이름이 없어지고 무궁화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62년에는 재건호, 66년에는 맹호호, 69년에는 관광호, 74년에는 새마을호로 바뀌었다.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명맥조차 끊긴 오욕의 세월이 14년. 새마을호가 생긴 74년 통일호는 부활됐지만 새마을호 무궁화호에 이은 3등열차 신세였다. 그로부터 20여년, 통일호는 새마을 무궁화호가 쫓아오면 다음 역에 멈추어 길을 비켜주는 처량한 신세로 살고 있다.

통일호열차 얘기에서 우리의 통일정책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쌀 지원 홍수피해 지원문제같은 최근의 대북정책이 원칙도 기준도 없고, 국민의 뜻과는 아랑곳 없이 밀실에서 대북정책이 이루어지는 데 실망한 때문이다. 집권당과 정부의 생각이 다르고, 정부안에서도 부처마다 목소리가 제각각이니 어떻게 통일된 대북정책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북한의 적화통일 정책에 정면대응한 북진통일·멸공통일론 시대가 지나간 지금 한국이 지향하는 통일국가의 이상과 이념은 무엇이며 통일방법론은 무엇인가. 외국인들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고 대답이 궁해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국가안보와 결부시킨 북진통일 멸공통일 이외의 어떤 통일론도 범죄시되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통일논의는 여전히 정부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사회분위기가 만들어낸 촌극이다.

이상과 방법론은 그렇다 치고 통일후에 대한 준비는 어떤가. 만일 북한이 동독이나 루마니아처럼 붕괴되는 날이 온다면 그 많은 난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준비는 돼 있는가. 천문학적인 통일비용은 어떻게 얼마를 비축할 것인지 계획서는 마련돼 있는가. 북한의 토지와 주택등의 소유권과 연고권을 둘러싼 분쟁을 해소할 방책은 무엇인가. 서로 총을 쏘고 집을 빼앗고, 고발하고 체포한 당사자들끼리의 원수갚음을 조정할 대책은 무엇인가.

있다면 그것은 여론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당사자 의견이 배제된 대책이라면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독일과 달리 우리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한 민족이어서 통일정책과 준비는 그만큼 어렵고 까다롭다.

통일은 갑자기 올 수 있다. 그 날이 그리 먼 훗날이 아닐 수도 있다. 통일논의를 활성화하고 준비를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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