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브리닌 당시 주미대사 회고록서 증언『유리 안드로포프(전소련공산당서기장)는 지난 83년 사할린 상공에서 발생한 KAL 007기 격추사건 직후 소련측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려 했으나 당시 국방장관인 우스티노프가 만류했다. 안드로포프는 미정보기관이 소련 극동지역의 미사일 방공망을 실험하기 위해 KAL 007기를 침투시킨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지만 소련군이 007기를 강제착륙시키지 못하고 격추시킨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로 생각했다. 그는 멍청이같은 군인녀석들이 문제를 일으켜 미소관계를 위태롭게 만들어놓았다고 나에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이는 62년부터 24년간 주미소련대사를 역임한 아나톨리 도브리닌이 최근 펴낸 영문 회고록 「비밀」(IN CONFIDENCE)에서 증언한 내용의 일부이다.
도브리닌은 모두 6백92쪽에 달하는 이 회고록 가운데 5쪽을 할애, KAL기 격추사건 직후 모스크바와 워싱턴간에 고조됐던 긴장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KAL기 사건―쓰디쓴 기억들」편에 나오는 도브리닌의 증언을 요약한다.
『83년 8월31일 KAL 007기가 사할린 상공서 피격돼 1명의 미의원을 포함해 2백69명의 승객이 몰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정부는 아주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비극적인 실수에 의해 KAL기를 격추시킨 사실을 즉각적으로 시인할 용기가 없었다. 소련정부는 당시 007기 격추에 대해 아는바 없다는 인상을 주려했다.
로널드 레이건미대통령은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러시아 공군조종사들이 민항기인 줄 알면서 007기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소련 조종사들은 한밤중 시계가 불량한 상태에서 007기를 외양이 비슷한 미군 첩보기로 오인했다. 이로 인해 레이건과 안드로포프간의 사적인 적개심에도 불이 붙었다. 사건이 양국관계에 중대한 위기로 비화한 것이다.
당시 크림반도에서 휴가중이던 나는 안드로포프 서기장의 부름을 받고 크렘린에 들어갔다. 그는 초췌하고 피곤한 모습이었다. 안드로포프는 나에게 「워싱턴으로 급히 돌아가 이 대결국면을 최선을 다해 무마해보라」고 지시했다.
우스티노프의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그는 극동방공사령부에서 소환돼온 장성들을 꾸짖고 있었다. 그는 방공망에 구멍이 난데 대해 격노해 있었다. 나는 당시 소련지도부가 007기는 철저히 계산된 미국의 정찰작전의 일환으로 소련영공을 침범한 것으로 확신했음을 분명히 증언한다. 우리가 궁금했던 것은 레이건이나 조지 슐츠미국무장관이 과연 사전에 그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였다』<워싱턴=이상석 특파원>워싱턴=이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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