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도 전략차원서… 내용 낱낱이 기록/「남북대화 목적만큼 과정 중요」 소신 불변7·4공동성명이 발표될 당시의 일이다. 나는 언론계의 중진들에게 비공식석상에서 그동안의 비밀협상 경위를 설명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
그 때 자리를 함께 했던 모윤숙씨는 브리핑을 듣자마자 나를 질타했다.
『반공정신이 투철한지 알았더니 회담을 하다가 붉은 색에 물든 것 아닙니까. 회담장에서 북쪽을 완전히 KO시키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나는 같은 비유로 응대했다.
『이 회담은 경기로 치면 1라운드에 불과합니다.우리는 15라운드까지 가서 KO가 아닌 판정승을 해야합니다』
나의 이 소신은 20년이상이 지난 지금도 변함 없다.
누가 나선다 해도 민족의 통일을 단숨에 이루어낼 가능성은 많지 않다. 남북관계는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풀어나가야 한다. 통일은 단 한번의 「위업」으로 성취될 수 없다. 남북대화나 대북정책은 목적과 함께 과정이 중요시돼야 한다. 과정에서 생길 숱한 작은 성공과 실패들이 모여야 통일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7·4공동성명과 남북조절위도 비밀실무접촉으로 시작됐다. 적십자 예비회담이 교착상태를 벗지 못하던 71년11월20일 나는 북한 노동당중앙위 책임지도원으로 북측의 차석대표였던 김덕현에게 비밀접촉을 제의했다. 이후 72년3월22일까지 11차례의 단독비밀접촉을 대표단까지 따돌린 채 되풀이 했다.
그러나 당시 둘만이 나누었던 대화내용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 됐다. 이 기록은 지금도 남북회담사무국에 보관돼 있다. 농담 한마디 까지도 내마음대로 건넨 것이 없었다. 모두 전략반에서 중지를 모아 만든 결정체 였다. 단독비밀접촉이었지만 나는 한마디 한마디에 책임을 질 수 있었다.
이 기록들은 지금도 회담요원들에 의해 활용되고 있다. 아마도 사정은 북측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과정을 중요시하지 않는 회담은 책임을 질 수 없는 제의들을 낳고 따라서 남북관계를 도리어 악화시킬 우려를 내포하고 있다.
완성된 작품에는 흔적이 남지 않더라도 밑그림은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그런 밑그림들이 모여 하나의 완벽한 청사진을 만드는 것이다.<전 중정협의조정국장·송정장학회 이사장> <유승우 기자>유승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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