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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 혼깃든 법화원/80년대말 일인승려 행적에 맞춰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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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 혼깃든 법화원/80년대말 일인승려 행적에 맞춰 복원

입력
1995.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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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봉안·기념탑세워 역사 바로세워중국 산둥(산동)성 웨이하이(위해)시의 현급시인 영성(영성)시내 석도진 적산에 위치한 법화원. 통일신라말기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며 해상권과 중계무역을 장악했던 「해상왕」 장보고(?∼846)의 혼이 깃들여 있는 사찰이다.

전남 완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무령군소장을 지낸뒤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현재의 완도)을 근거로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독점하며 해양문화의 기틀을 세웠다. 법화원은 820년대초 장보고가 해상무역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그의 본원사찰이었다.

이후 법화원은 당 무종 5년(서기 845년) 혹독한 법난으로 헐릴 때까지 당시 중국에 살던 신라인들의 신앙의 중심지이자 나 당 일 3국을 잇는 교역의 심장부였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 사찰에는 20여명의 스님과 비구니들이 있었고 불당은 2백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정도의 규모였다. 그리고 5백섬의 곡식을 수확하는 장전을 소유, 당나라에서도 이름난 사찰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법화원은 당시의 모습이 아니다. 당대의 절로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오대산의 당묘를 축소해 지었다고는 하지만 그 규모나 모습이 문헌에 나오는 당시의 법화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는 지금의 사찰이 일본의 역사서와 일본인들의 경제적 지원에 상당부분 의존, 건립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87년 이곳을 방문한 일본의 산둥반도 역사기행단이 당시 법화원의 도움으로 구법의 길을 걸은 일본승려 원인의 행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곳을 일본의 역사유적화하려 했던 것.

위해시정부 여유국도 현재의 법화원은 원인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기록된 위치와 규모등에 따라 복원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초기에만 해도 일본인들이 세운 비석만 있었고 이 비석들에는 장보고에 대한 언급은 없이 원인과 법화원의 관계만 적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인들의 역사 왜곡사실을 확인한 국내 학자들과 뜻있는 인사들의 노력으로 90년 5월 장보고의 위업을 기록한 기념비가 세워졌고 같은해 6월에는 장보고의 영정도 봉안됐다. 그리고 지난해 7월 통일원산하 세계한민족연합과 영성시가 합작으로 만든 「장보고기념탑」이 우뚝서 장보고의 위업이 다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웨이하이=김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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