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님/광복 50돌에 생각나는 그이름(틈으로 본 세상:8)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님/광복 50돌에 생각나는 그이름(틈으로 본 세상:8)

입력
1995.08.11 00:00
0 0

◎빈 틈에 넘치는 창조적 가능성을 모색한다/세상의 모든것 귀하게 여기는 말/해방·민주위해 싸우다간 원혼들/형식적 기념식·동상은 이제그만/내마음속 참뜻 되살릴때 새세계아름다웁고 웅숭한 숱한 우리말 가운데 그 중에도 으뜸이 「님」이라는 말이다. 그 뜻의 깊음과 넓음, 그 울림의 따스함과 거룩함에서도 그러하니 우리 민족은 옛부터 가장 귀한 이를 높여 님이라 불렀다.

그러매 한울과 조상과 어른을 님이라 부름은 당연하거니와 아드님, 따님, 아우님, 벗님, 그 중에도 나그네를 손님이라 부름은 결코 심상한 일이 아니다. 「손」은 「신」의 다른 말 아닌가!

그뿐이랴. 햇님은 어떠하며 달님 별님은 어떠하고 꽃님 풀님 쟁기님은 또 어떠한가. 용비어천가에 「수만리 님이어시니」 했으매 대지 또한 님이다.

어찌해 님이며 님이라 부름은 어찌하자 함인가?

설운 님 보내옵노니 가시는 듯 도셔 오소서 했다. 가시리 가시리를 부르며 보내는 이의 마음 속 님은 서러운 그리움, 맺힌 정한 그것이고 가시는 듯 그렇게 돌아오시는 이의 마음 깊은 곳 그 웅숭함을 님이라 외쳐 부름이다.

올해는 광복 50년.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위당 정인보선생님의 노랫말이다.

「어찌하리」

님의 비밀은 바로 이 말 한 마디 안에 있다.

광복의 기쁨에 들떠 거리의 물결에 휩쓸리면서도, 매운 매화향기처럼 살다 이 날을 채 못 보고 가신 어른님 벗님들의 지금 그 신령의 서운한 기쁨을 잊지 않고 민망해 하는 나의 마음, 여기에 님의 산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매 님만 님이 아니요 기룬 것은 모두 님이며 석가만이 중생의 님이 아니라 중생이 곧 석가의 님인 것이다.

님의 속뜻은 「기룸」에 있고 기루는 마음이 바로 님이다.

「어찌하리」라 하셨다.

참으로 어찌할 것인가?

강폭한 일제의 말발굽 아래 여지없이 유린된 35년의 칠흑밤을 어른님 벗님들은 그 어떤 마음으로 살다 갔는가? 우리는 지금 그 마음을 알고 있는 것인가? 참으로 민망해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 과연 그런 마음이 있기나 한 것인가?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만해스님의 이 「기룸」을 지금 우리는 어찌하고 있는가? 갈라진 삼팔선에서 울며불며 한울을 원망하는 동포들의 참혹한 환영에 휩싸여 그들이 제 집으로 모두 다 돌아가는 날을 통곡으로 기원했던 백범선생님의 그 마음 속 님을 지금 우리는 어찌하고 있는가?

동상을 만들어 높이 세우고 기념일마다 미사여구로 칭송하며 잊지 말자 거듭거듭 맹세한다. 그러나 돌아서는 순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지금도 살아 뜀뛰는 그 마음을 님이라는 호칭 속에 무참하게 가둬버리며 저 숱한 동상 속에 여지없이 박제해 버린다.

제 자신이 무엇이며 누구인지 잊어버린지는 이미 오래다. 심지어 제 목숨 귀한 것도 잊어버리고 돈에만 환장해 있으니 삼풍참사에 죽어간 이들의 목숨이 심중에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무수히 죽임 당하는 풀잎이, 꽃들이, 새와 다람쥐와 물과 흙과 산의 목숨이 심중에 있겠는가.

제 자식이 신령한 생명을 모신 거룩한 존재임을 잊은지는 아주 옛날이다. 제 좋을대로 이리저리 빚을 수 있는 흙덩어리쯤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흙마저도 생명과 마음이 있는 법. 생명. 이것이 나의 님이요, 마음. 이것이 생명의 님이다. 님을 잊었으니 우리는 이미 죽은 것이다.

굶주리다 못해 그 독살스런 정치적 자존심마저 꺾고 쌀지원을 요청한 북한동포들에게 정부가 쌀을 제공했다 하여 잘난 체 전략 운운, 가차없이 공격하며 다라운 인색을 과시하는 거기 무슨 마음이 있으며 하물며 그리 어렵사리 제공한 쌀을 「서해망둥이」니 「빗자루」니 하며 오만무례하게 축산에나 쓰겠다는등 배은망덕을 서슴지 않으며 거기다 수송선까지 억류하는 북한의 꼴불견에 가신 님들의 「기룸」의 깊은 신령이 와 머물 수 있으랴. 님이 당할 소린가?

뻥 뚫린 틈.

「어찌하리」라 하셨다.

참으로 어찌할 것인가?

그 틈,

안으로 들어가자.

안으로 깊이. 깊이!

우리는 지금 너무 멀리 밖으로 나와 있다.

안 깊숙이 님들의 그 따뜻하고 거룩한 마음이 여전히 살아 계신다. 거기서 가르침을 받자. 위선적으로 고정시킨 님의 호칭 속으로부터, 딱딱한 동상 안으로부터. 돈에 미치고 겉멋에 들뜬 우리 몸 속 깊은 곳 동굴에 갇힌 저 참으로 기루는 마음. 저 신령한 님들의 넋을 해방시켜 오늘에 활동하게 하자. 그 것은 또한 새의 생명이며 풀의 마음이다. 우리 안에서 그것이 해방될 때 새도 풀도 다 살아나 다시금 지저귀고 예쁘게 살랑거릴 것이다.

시절이 바삐 변하고 있고 관념론을 말할 때가 아니며 지금은 경제력과 유물론의 시대라고 잘난 체 떠들지 말라. 분명히 알아둘 것은 지금은 도리어 생명과 영성의 시대라는 것이다. 환경위기와 생태학의 시대요 모든 것이 안으로 굴러들고 있는 때다.

정보화가 창조화로, 비트가 아이디어로, 하드웨어가 소프트와 휴먼웨어로, 다시 그 안에 제공되는 정보의 질로, 경제력 중심이 문화적 창의력 중심으로 내권하고 있으며 동북아 일원의 역내 무역량의 가속적 증대는 급기야 축적된 동북아 전통문화의 저 깊은 영적 생명의 우주관으로부터 새 문명의 비전을 기어이 도출하고야 말 기세다.

「어찌하리」라 하셨다.

참으로 어찌할 것인가?

틈으로, 안으로 들어가자.

그리하여 새롭게 다시 밖으로 나오자. 그때는 놀라운 비약이, 대차원 변화가 일어난다.

내 안 틈속의 그 무궁한 생명의 신령함을 모시는 것. 그리하여 님을 다시 회복하고 제 자식과 이웃과 삼라만상을 다시금 님이라 불러 기루는 것. 그것이다.

잊고 있는 한, 모시지 않는 한, 님을 가두고 멸시하는 한, 님들은 도리어 원혼이 되어 우리를 괴롭힌다.

기념비도 기념행사도 이제는 신물이 난다. 우우 떼지어 악을 쓰며 몰려 다닐 일이 아니다. 조용히, 각자각자 소리도 매도 없이 제 안으로 살며시 들어가자. 나름나름으로 님을 되찾자.

일제 암흑 속에 수난하신 이들의 신령을 우리 마음에서 모두 복권시켜야 한다. 저 끔찍했던 6월전쟁에서 죽어간 4백만 원혼을 좌우 가리지 말고 모두 다 해원시켜야 한다.

참혹했던 이승만독재에 항거하여 죽어간 4월의 원혼을, 무자비했던 군사독재 아래 고문당해 뒤틀린, 핏빛 저항의 지하실에서 스러져간, 살아 있다 해도 응어리진 모든 신령을 풀어 해방시켜야 한다. 그러나 부디 굳게 함구하고 각자 각자가 남 몰래 하자. 귀신의 일은 조심하여 혼자서 한밤중에 지성으로 하는 법이다.

1980년 5월 18일.

나는 그때 감옥에 있었다.

광주의 피바다! 며칠 밤 며칠 낮을 뜬 눈으로 지샜다. 내 고향이다. 평생을 객지를 떠돌며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맹세하던 그리운 고향. 그 고향의 피바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지난 15년동안 단 한 번도 광주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1981년 초가을.

대구로부터 버스편으로 하동 섬진강을 건널 때다. 햇살에 반짝이는 가녀린 댓잎들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숨죽여 울며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저 피바다의 땅에서 다시 시작하리라. 말없이 새로 출발하리라!」

4년후 나는 기어이 해남으로 돌아갔고 바로 거기서부터 오늘의 「생명과 자치」운동을 새로이 시작했다.

근본적인 차원변화 없이는 전라도의 깊은 한은 참으로 해소되지 않음을 나는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날, 5월의 그 날, 감방 안에서 이를 악물고 맹세했다. 어떤 비웃음, 어떤 모멸도 이것을 위해서는 견디리라 맹세했다. 입을 다물고 소리없이 오래오래 꿇어 엎드려.

그러나,

동지는 간 곳 없고

깃발만 나부껴

「님을 위한 행진곡」의 첫 구절. 지금도 갇혀 있는 황석영의 저 유명한 노랫말이다. 그런데 왜 님이라 했을까? 님! 님! 님!

해남집 골방에 혼자 있을 때 낮게낮게 이 구절을 몰래 부르며 울고 또 울고 다시 흐느끼곤 했다.

세월이 물같이 흘렀다. 나의 운동도 작지만 이제는 틀을 잡았다.

이제야 비겁한 바보같이, 다 뒤늦게야 15년만에 처음으로 나지막히 한 마디 한다.

『책임자를 처벌하라』

그리고 나서 조금 높은 소리로.

『비자금도적놈을 잡아 족쳐라!』

후안무치.

피바다의 살인자에 비자금도적이라니. 어물쩡 말을 바꾸며 숨기려는 정부여당과 때맞춰 터져 나오는 신당과 자민련의 검은 돈. 다 똑같다.

『우리와 무관한 일에 언급할 필요도 관심을 둘 일도 아니지만 결코 유야무야 넘기지는 않겠다』

『무관하다. 우리쪽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길이 아니면 가지 않고 말이 아니면 대답하지 않겠다』

그리고 또 한편은 침묵.

후안무치.

님들 앞에 부끄럽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것. 부끄러운 것. 이것이 광복 50년을 맞는 우리들 마음속 님의 현주소다.

일제 총독부건물 철거 하나만은 잘하는 일이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한다.

지나간 1백년의 우리 역사.

도무지 웬 도적놈과 떼죽음이 그리도 흔했던가? 무엇을 위한 그리도 더럽고 참혹한 타락과 고통이었던가?

전 문명사의 대전환. 후천개벽.

그것을 이 땅이 먼저 시작하는 것. 그리하여 온 인류와 뭇 중생과 전지구를 구원하는 것. 그렇게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틈의 오묘함.

오월광주의 원혼들을 우리 마음마다의 안에서 이제 참으로 복권시키고 풀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소급하여 1백년 전 갑오혁명에서 도륙당한 50만 동학군의 저 핏빛 원혼을 깊이 달래고 참으로 해원시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삶, 우리 문화 본디의 님을 소생시키는 첫 걸음이다.

님.

수운 최제우선생은 님의 뜻을 다음과 같이 풀었다.

「높이 공경해 불러 모시되 천지 부모 음양 일월과 더불어 친구로서 동사함」

제 속의 신령을 모셔 깨치는 이치요 부자지간 부부지간, 조상과 자손과 모든 인간관계, 삼라만상 자연과의 관계 일체를 새롭게 하는 새 예절이요 새 삶의 원리다.

이때 님들의 신령이 우리들 각자 안에 살아나 우리의 갈 길, 참으로 오묘한 새 세계 창조의 비밀을 가르쳐 줄 것이다.

님.

이것은 그때에 도리어 국운비약의 요체인 높은 문화의 의가 될 것이다. 참통일의 길을 열 것이다.

강력과 부력보다 문화력에서 민족의 미래를 예언한 백범선생님의 그 놀라운 혜안을 부디 잊지 말자.

광복 50주년의 한 소회다.<작가=김지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