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쓰레기로 뒤덮이는 낙원이서국은 한 2천년 전에 경상북도 청도땅에 있던 부족국가라고 한다. 신라의 삼국통일도 아니고,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도 아닌 일,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무방할 한 부족국가가 그때 거기 존재하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몇 줄을 써 넣게 한 일이 지금 우리의 이 문명, 우리의 자동차 대수에 무슨 변화를 가져왔을까. 서림의 시집 「이서국에 들어가다」는 이 역사적 의의라는 것에 관해 매우 이상한 의견을 말한다. 역사가 아니었던 것들이 바로 그 때문에 우리의 삶을 온통 차지하고 있다는 말로 아마도 그 의견을 요약할 수 있으리라.
이서국은 다른 무엇이 되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서림에게는 그의 고향 청도가 여전히 이서국이다. 「청도장」에서 생선 파는 늙은 과부 장씨가 파장 때 「남은 고등어로」 잉어 한 마리를 살 때, 이서국의 늙은 수렵꾼은 값비싼 꽃사슴가죽을 「어쩔 수 없이」 잉어와 바꾼다. 늙은 과부의 딸이 「아비도 모르는 아이 지우고 기어들어와 실밥처럼」 풀려 있을 때, 수렵꾼의 딸은 「작년 봄 빚값으로 중랑장 끌려갔다가」 임신한채 병들어 쫓겨와 있다. 「청도 그리고 이서국」에서는 예비군들이 카빈 들고 사주경계 서는 참호 속에 「죽창 든 이서국의 늙은 병사」가 졸고 있으며, 「패랭이 눈에 고정된 하늘」 아래 「대구서 온 인부들, 열심히, 아파트, 만들면」 그 속에 이서국 사람들의 토담집이 자리를 잡는다. 청도사람들에게 이서국은 「세상을 보는 거울」이며, 「이 세상이 이서국의 안이고 밖이다.」
이서국이 이렇듯 저 옛날에 벌써 패망한 다음 「모든 청도사람 속에 들어와 영원히」 살아 있는 방식은 신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지루하다. 서림의 시에 따르면 역사의 진정한 얼굴이라고 불러야 할 이 지루함에 무슨 영원회귀의 이론을 결부시켜야 할까. 물론 아니다. 영원회귀는 한 번 저질러진 사건의 무한한 중요성을 말한다. 이서국의 지루한 영생은 그와 반대로 사건이 한 번도 제대로 저질러지지 않은 데서 기인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역사의 불행은 그 피비린내가 아니라 이 지루함이다.
이 지루한 역사 속에서, 또는 역사없음 속에서, 패랭이꽃을 쥐어 뜯는 아낙의 울음이 고대의 비명이듯, 시골 장거리를 술 취해 걸어가는 시인은 2천년 전부터 술에 취해 있다. 자기들이 역사의 중심과 선두에 서 있었다고 내내 믿어온 집단의 시인은 때로는 역사 밖을, 이를테면 잃어버린 낙원같은 것을 꿈꿀 수 있겠지만, 자기 땅에 몰려온 것이 역사의 쓰레기뿐이라고 믿는 시인은 무엇을 꿈꿀 것인가. 그는 낙원을 잃어버릴 기회도 없었다. 그는 꾸준히 더럽혀지는 낙원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낼 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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