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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열사 기념관 5일 네덜란드 헤이그시서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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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열사 기념관 5일 네덜란드 헤이그시서 개관

입력
1995.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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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 가셨어도 애국혼은 영원히…/본사·보훈처·이준 아카데미 공동추진·전경련 협찬일성 이준열사 기념관이 광복50주년과 이열사의 순국 88주기(7월14일)를 맞아 5일 네덜란드 헤이그시에서 개관된다. 이 기념관은 국가보훈처·사단법인 이준아카데미·한국일보사가 공동으로 추진하고 전국경제인 연합회가 협찬해 개관하게 됐다. 해외에서 순국한 선열의 애국정신을 기려 순국현지에 세워지는 최초의 기념물인 기념관의 개관을 계기로 이열사 특집을 마련했다.<편집자 주>

◎망국의 한 품고 투숙했던 옛 드용호텔에/순국 88주기 맞아 해외선열 첫 사적지로/미공개 친필탄원서 등 자료 80여점 전시

1907년 고종황제의 밀명으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준 열사가 망국의 한을 새기고 투숙했던 네덜란드 헤이그시 와건스트라트124 옛 드용호텔에 마련된 이준열사기념관은 최초의 해외 순국 선열의 사적지가 된다.

이열사와 함께 밀사로 파견됐던 이상설 이위종 열사의 유품과 관련자료가 전시되는 이상설·이위종실, 한국역사·문화실 세계평화실 등이 들어서는 기념관에는 김영삼대통령의 「세계평화」친필휘호도 전시된다.

기념관 설립은 한국일보사 국가보훈처 사단법인 이준아카데미가 열사의 숭고한 애국혼을 받들어 이곳을 민족정기를 드높일 수 있는 유럽지역 구심점으로 삼자는데 뜻을 같이해 성사됐다.

네덜란드 교포실업가인 이기항(59·이준 아카데미원장)씨는 지난 2월 사재 20만달러를 들여 옛 드용호텔을 매입했다.

한국일보사와 국가보훈처 이준아카데미가 공동으로 광복50주년 기념사업으로 이준열사기념관 설립에 적극 나서자 전경련은 기념관 보수와 전시물 수집 등에 필요한 비용 4억원을 본사에 기탁했다.

이어 지난 3월에는 이준열사 기념관설립 기획위원회(위원장·이현희 성신여대 교수)가 발족돼 기념관 전시, 운영 등에 관한 자문에 응했다.

서울대동창회는 또 대한항공의 협찬으로 기념관에 이열사의 흉상을 기증했다. 이 흉상은 77년 헤이그시 뒤넨공원에 있는 열사의 묘적지에 제막된 흉상과 똑같은 것으로 백문기(전 서울대 미대교수)씨가 제작했다.

서울대 동창회가 열사의 흉상을 기증한 것은 열사가 올해로 1백주년을 맞는 서울대법대의 모태인 한성법관 양성소의 제1회 졸업생이기 때문이다.

열사는 근대사법제도 도입을 위해 1895년 설치된 한성법관 양성소에 37세의 만학도로 입학, 6개월과정을 수료한 제1회 졸업생이다. 열사는 그뒤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일하는등 한때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열사의 막내딸로 지난 83년 작고한 이종숙씨의 딸인 유성천(68)여사는 열사가 남긴 친필이력서와 친필탄원서 등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중요한 유품을 기념관에 선뜻 내놓았으며 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열사의 친필탄원서는 당시 만연된 불법과 비리를 척결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법무대신에게 직접 보내는 것이어서 열사의 강직함, 개혁의지, 우국충정을 엿보게 하는 유품이다.

이밖에 이준열사 기념사업회가 국내외에서 수집한 자료 80여점과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이선준 회장이 집필한 열사의 전기 5백권도 전시된다.<이진동 기자>

◎이준열사 밝혀지지 않은 사인/자결·병사·단식순절 등 의견 분분/일부 “일인에 의한 암살설” 제기도/한때 「분사」로 기록… 62년에 순국으로 통일

고종 황제의 밀명으로 이상설 이위종 선생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돼 국권회복을 호소하다 1907년 7월14일 숨을 거둔 일성 이준열사는 아직까지 사인에 물음표가 붙어있다.

국사편찬위는 지난 62년 1월 사인심의회를 열고 이열사의 죽음을 「순국」으로 통일했다. 57년무렵은 「분사」로 기록되기도 했다. 「자결설」 「병사설」 「단식순절설」 「분사설」 「암살설」등 주장의 근거를 소개한다.

◇자결설

이 설의 근거는 당시 서울서 발행되던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기사다. 1907년 7월19일자 대한매일신보 호외는 「…작일 동경전보를 거한즉 … 충분한 지기를 불승하여 인이자결하여 만국사신지전에 열혈을 …」이라고 보도했다. 같은 날짜의 황성신문 호외도 『경문한즉…이준씨는 불승분격하야 자기의 복부를 할부자처하였다는 전보가 동우회중으로 내도하였다는 설이 유하더라』라고 적고 있다.

◇병사설

이열사가 종기 악화 등으로 투숙중이던 드용호텔이나 병원에서 숨졌다는 주장이다. 병사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대부분 당시 네덜란드의 신문 등 현지의 기록들이다.

◇단식순절설

이열사가 만국평화회의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하다 좌절되자 여러날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는 주장이다.

◇기타

이밖에도 1963년9월26일 이열사의 유해를 서울로 이장하던 날 네덜란드의 「하그쉐 쿠라트」지가 『이준은 자결했던 것인가, 살해당한 것일까, 혹은 병사일까』라고 특집기사를 보도, 일본인에 의한 암살설이 제기됐다.<김광덕 기자>

◎특별기고/“러시아는 밀사에 냉담했다”/넬리도프 의장에 “접촉 삼가라” 전문/“만국회의서 적극 후원” 사실과 달라

헤이그밀사 사건에 러시아는 어떻게 대처했는가.

지금까지는 이준열사 등이 파견된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 의장국인 러시아가 헤이그밀사들을 적극 옹호하고 후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제정러시아 대외문서 보관서에서 새로 발굴한 을사늑약과 헤이그밀사 사건에 관한 자료에 의하면 1905년 포츠머스조약이후 러시아는 자국의 이권에만 급급한 나머지 일본의 을사늑약(늑약 강제로 맺은 조약)을 용인해 주고 헤이그밀사의 회의 중재요청을 뿌리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본의 침략상을 헤이그에서 세계각국에 알리고 국제여론의 힘을 빌려 주권을 되찾으려 한 고종황제의 마지막 의지가 무참히 꺾이는데 러시아가 일조를 한 셈이다.

노·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1905년 9월5일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국에서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는 제반조치는 한국정부와 합의한다』고만 규정, 대한제국의 독립문제에서 멀찌감치 물러섰다.

일본은 대한제국 주권침탈의 마지막 걸림돌을 포츠머스조약으로 제거하자 그로부터 2개월여만인 1905년 11월17일 거리낌없이 을사늑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을사늑약직후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내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알렸으나 러시아는 포츠머스조약으로 더 이상 문제삼기를 꺼렸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마저 박탈당한 고종이 세계 각국 대표가 참가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장에서 일본의 침략성을 알리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종은 극비리에 한국의 어려운 실정을 세계각국 대표에 전할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명을 헤이그밀사로 파견했다.

이렇게 파견된 헤이그 밀사에 대한 러시아의 태도는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의장국인 러시아정부는 밀사가 도착하기직전 제2차 만국평화회의 의장 넬리도프에게 『그들이 공식대표가 아닌 점을 통고하니 회의참가중재요청을 해올 경우 접촉을 삼가기 바란다』는 전문을 보냈다. 한국의 밀사가 헤이그에 도착했다는 로이터통신이 타전된 다음날인 6월30일 넬리도프는 『한국인들이 왔으나 접견을 거부했다』는 보고문을 본국으로 띄워 아예 접촉마저 기피했다고 알렸다.

러시아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달리 이처럼 포츠머스조약으로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으며 자국의 이권에서 멀어져간 대한제국의 헤이그밀사들에게 처음부터 후원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박종효 모스크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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