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 승전드라마 온국민 열광케/손기정·김기수·신동파·차범근·김진호·현정화이어/「별중의 별」 황영조까지 수많은 영웅들 뜨고 지고한국체육은 45년 해방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세계스포츠강국대열에 우뚝섰다. 놀랄만한 한국체육의 고속성장은 수많은 선수들의 피와 땀에 의한 것이었다. 지난 50년간 갖은 어려움을 이기고 세계를 제패, 국민의 심금을 울린 많은 스타들이 명멸했다. 쉽게 잊혀져간 반짝스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세월을 뛰어넘어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자리잡은 대스타들도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세계최고의 자리를 꿰찬 인간승리의 주인공들이 수없이 많다.
체육사가들은 해방이후 50년을 보통 3구분한다. 광복후 민족체육활동이 부활된 후 한국체육의 기틀을 다진 61년까지를 격동기로, 경제성장과 보조를 같이하며 한국체육의 위상을 국제무대에 확인시켜 준 80년까지를 중흥기로, 86년 서울아시안게임 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며 세계스포츠 열강대열에 합류한 80년대를 황금기로 잡고 있다.
해방이후 국민에게 가장 먼저 스타대접을 받았던 사람은 마라톤의 서윤복이다.
서윤복은 정부가 채 수립되기도 전인 47년 4월19일 세계유수의 마라톤대회인 보스턴대회에서 2시간 25분 39초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해 온 세계에 「코리아」의 이름을 드높였다. 일제치하에서 손기정이 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했으나 나라잃은 슬픔을 맛보아야 했던 국민에게 서윤복의 마라톤 세계제패는 더없는 경사였다. 당시 서윤복의 우승을 기념하기 위한 마라톤제패가를 현상모집할 만큼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또 서윤복이 귀국하던 6월 21일 집집마다 국기를 게양했고 다음날 군정청 앞뜰에서 열린 환영회에는 수만의 시민들이 몰렸다. 서윤복과 함께 초창기 한국체육을 대표하던 선수가 역도의 김성집이었다.
김성집은 한국이 처음으로 참가한 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 2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동메달을 획득하는 투혼을 과시했고 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도 동메달을 따내 한국올림픽출전사상 최초로 2회연속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는 기록을 세웠다. 56년 멜버른올림픽 복싱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송순천은 한국최초의 복싱영웅으로 기억되고 있고 58년 도쿄아시안게임 마라톤에서 우승, 국민과 재일동포들에게 벅찬 감격을 안겨준 이창훈도 격동기의 한국체육을 빛낸 스타들이다.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스포츠도 엄청난 발전을 거듭한 중흥기에 한국체육의 우승성을 세계에 떨친 스타는 장창선. 장창선은 64년 도쿄올림픽 레슬링자유형 플라이급에서 은메달은 따낸데 이어 66년 세계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권대회에서 세계의 강호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장창선은 콩나물장사를 하며 뒷바라지를 해온 어머니 김복순씨의 정성으로 세계정상에 우뚝 선 인간승리의 주역으로 국민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김기수는 한국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으로 70, 80년대 국내최고의 인기스포츠였던 프로복싱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특유의 맷집과 저돌적인 스타일의 김기수는 66년 WBA 주니어미들급타이틀전에서 챔피언 리노 벤베누티(이탈리아)를 꺾고 새로운 챔피언이 된 한국권투계의 보배다. 홍수환은 7전8기의 신화를 창조하며 두체급에서 세계를 제패, 김기수의 뒤를 이었다. 프로복싱과 함께 프로시대를 연 프로레슬링의 장영철과 김일은 한때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선수들이었다.
국내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세계무대에서 번번이 좌절하던 구기종목가운데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여자농구이다. 여자농구는 67년 체코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단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소련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대회최우수선수로 뽑힌 박신자의 인기는 대단했다.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농구의 천재」로 평가받은 박신자가 출전하는 경기를 보기위해 많은 팬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당시 여자실업농구는 최고의 인기종목이었다.
김영기라는 불세출의 스타이후 침체됐던 남자농구도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에 아시아무적을 자랑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 백발백중 골인시키는 신동파는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알아주는 스타였다.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수영2관왕에 오르며 국민적인 영웅이 됐다. 당시 조오련은 양정고 2년에 재학중인 17세의 소년이었다.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도 자유형 400, 1,500를 석권했던 조오련은 80년 대한해협 횡단에도 성공했다.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는 70,74년 아시안게임 여자투포환에서 2연패를 달성한 철녀로 유명하다.
73년 유고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전을 석권했던 이에리사는 「탁구의 마녀」란 별명을 얻으며 국내스포츠 톱스타 자리를 꿰찬 신데렐라.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 출전한 양정모는 몽고의 오이도프와 치열한 접전을 펼치며 해방이후 한국최초의 금메달리스트로 기억된다. 몬트리올에서 여자배구가 세계장신과 거포들을 물리치고 올림픽사상 최초로 구기종목 메달을 획득했다. 동메달의 주역중 자그마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강타를 내리꽂던 「나는 작은새」 조혜정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선수다.
80년 남자배구를 대표한 강만수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스타이다. 해방이후 경평전에 구름같은 관중이 몰리곤 하던 국내최고의 인기스포츠 축구는 50년대 최고의 골잡이 최정민 이후 60, 70년대를 주름잡던 이회택의 대를 이어 출현한 게 한국축구의 영원한 스타 차범근. 차범근은 태극마크를 달고 아시아무대를 누비다가 79년 세계축구의 최고봉인 독일의 분데스리가에 진출, 한국축구의 위상을 세계에 널린 알린 선수다. 차범근을 배출한 한국축구는 세계수준과 격차를 좁히며 86년 멕시코, 90년 이탈리아, 94년 미국월드컵에 연속출전하는 쾌거를 이룬다. 김진호는 79년 세계 양궁선수권 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 양궁한국의 기치를 높이들며 한국체육 중흥기를 장식했다.
80년대이후 황금기를 맞은 한국스포츠는 황영조라는 영웅을 탄생시킨다. 황영조는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 전국민을 열광시켰다. 일제치하에서 손기정이 올림픽마라톤을 제패한후 무려 56년만에 또다시 세계정상에 오른 황영조는 광복이후 한국이 낳은 최고의 스타로서 손색없다.
82년 방콕아시안게임과 86년 서울아시안게임 여자수영 배영종목에서 2연패를 달성한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는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았고 여자농구의 박찬숙, 여자탁구를 또다시 세계정상에 올려놓은 양영자 현정화, 84년LA올림픽 유도에서 금메달을 따낸 하형주등도 빼놓을 수 없는 영웅들이다.
88년 서울올림픽에서 2관왕에 오른 김수녕은 세계 양궁계에서 「신궁」으로 통한 명사수였다. 일본프로야구에서 한국인의 우수성을 떨친 장훈 백인천과 82년 출범한이후 국내최고의 인기스포츠로 자리잡은 프로야구의 선동렬도 스타대열에 합류한 선수들이다. 또 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최초로 금메달을 따낸 채지훈은 한국체육을 빛낸 영웅중의 한명이다.<정연석 기자>정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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