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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슬라브·회교 6백년간 반목/발칸반도 증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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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슬라브·회교 6백년간 반목/발칸반도 증오의 역사

입력
1995.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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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원인 되기도… 티토 집권하 한때 화합/유고해체후 분규 재연 「유럽의 묘지」「사라예보의 총성」이 또 다시 울리고 있다. 금세기초 1차 세계대전 발발의 신호탄이 됐던 「사라예보의 총성」은 한세기를 마감하는 현재 다시 울려 퍼지며 보스니아 사태를 금세기 최악의 민족분규로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현재 「세계의 화약고」발칸반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보스니아 사태가 쉽사리 그 끝을 보이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 분규가 화합불가능한 이질성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13세기께 동진하던 게르만족과 서·남진하던 슬라브족간에 「문화의 충돌 현장」이 됐던 발칸은 이어 14세기 융성한 오스만터키제국의 회교문명이 진입하며 천형의 땅이 됐다.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등 게르만계의 기독교와 세르비아를 중심으로한 동방정교회, 보스니아를 포함한 남부권의 회교등 3개 종교와 알바니아계와 그리스계등 5개 민족, 4개의 언어, 2개의 문자권이 기묘히 혼재해 갈등의 소지를 항상 품고 있었다.

이후 6백년간의 발칸 역사는 피가 피를 부른 반목과 대립의 역사였다. 1389년 현재의 코소보지역 암제펠트전투에서 대참패를 당한 세르비아민족은 이후 1878년 왕국을 재건할 때까지 4백년동안 회교문화권인 터키족의 혹독한 지배를 받으며 지울수 없는 민족적 상흔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었다.

또 20세기 들어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동족인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발판 삼아 확장해오자 세르비아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페르디난트 황태자부부를 암살, 1차대전의 뇌관을 터뜨린다. 1차대전이후 세르비아의 탄압을 받아오던 게르만족 계열의 크로아티아는 2차 대전중 나치독일에 협력하며 테러조직인 「우스타샤」를 조직, 세르비아계 1백여만명을 학살하는 앙갚음을 했다. 서로의 감정의 골은 지울래야 지울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듯 발칸의 역사는 유고슬라비아라는 국명이 「남부슬라브족」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그 구심체인 세르비아계의 「대세르비아권」과 지배를 벗어나려는 다른 민족·종교·문화권간의 끊임 없는 충돌로 점철돼 왔다. 결속이 약화한 틈바구니가 생길때 마다 이질성이 고개를 내밀며 유혈로 번졌다. 비록 잠시나마 이들 민족들을 한 울타리에 묶어두었던 것은 티토의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인터내셔널리즘을 표방한 사회주의라는 이념이었다. 그러나 80년 티토가 사망하고 이어 80년대말 사회주의마저 종언을 고하자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이 우세했던 유고연방의 해체는 필연적이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91년 각각 독립을 선언, 내전이라는 진통을 겪으며 떨어져 나갔다. 다음 차례인 보스니아는 92년 2월 다수민족인 회교도를 중심으로 독립을 선포했으나 양상은 달랐다. 지정학상 유고슬라비아가 안고있던 모든 고질적 병폐가 압축돼 있던 보스니아의 분규는 폭발력도 그만큼 컸다.

인구의 45%를 차지하는 회교도와 세르비아계(32%), 크로아티아계(17%)가 얽히고 설켜 벌이는 처절한 민족분규는 이제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기 조차 어려운 가운데 모두의 수수방관속에 「유럽의 묘지」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있다.<윤석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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