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밤 광주 재야인사·학생간부 체포/18일 새벽 주요대학 계엄군 배치완료/보안사 입안따른 정치활동 금지 포고령/18일 장갑차동원 국회봉쇄·정치인 검거▷비상계엄 확대이전◁
◇정치 사회 학원등 동향=국회 개헌특위 설치에 이어 80년 2월29일 윤보선 김대중씨등 6백87명에 대한 사면·복권이 단행돼 소위 「서울의 봄」이 왔다고 운위됐다. 그러나 4월14일 최대통령은 전두환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 민주화에 대한 비관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학생회가 부활된 각 대학에서는 4월들어 학원민주화투쟁이 전개됐다. 24일 서울 14개대 교수 3백61명은 학원민주화선언을 발표했다. 근로자들의 요구도 거세져 4월21일 사북사태등 5월까지 8백건이 넘는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5월15일 서울역앞 광장과 도로에는 35개 대학생 10만여명이 집결해 시가지시위를 벌였다.
◇보안사령부 동향=전두환보안사령관은 80년2월 보안사 정보처를 복원하고 이상재 준위를 반장으로 하는 언론대책반을 구성했다. 5월초 대학가시위가 가열되자 전사령관은 권정달정보처장에게 「시국수습방안」 검토를 지시하고 이학봉 대공처장에게 소요 배후조종·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 검거준비를 지시했다.
◇계엄확대 이전 군동향=이희성 계엄사령관은 4월들어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예하부대에 소요진압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했다. 5월13일 육본은 전군에 진압부태 투입 준비지시를 내리고 14일 하오 3공수여단이 국립묘지에, 수경사 6개 중대가 광화문지역에 배치됐다.
▷전두환의 정국 장악◁
◇비상계엄 전국확대 전격 추진=5월17일 상오 9시30분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권정달 정보처장을 주국방부 장관에게 보내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해산등 「시국수습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겠다고 통보하고, 그 내용을 전 군주요 지휘관회의 결의사항으로 대통령에게 건의하는등 필요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했다.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는 계엄확대를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참석자들에게서 연서명을 받았다. 하오 5시10분 전사령관등으로부터 「시국수습방안」을 보고받은 최대통령은 계엄확대방안만을 수용하고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국무회의는 18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육본은 18일 새벽 전국 92개 주요대학과 국회등 1백36군데에 계엄군 2만5천명을 배치했다.
◇정치인과 재야인사의 체포·연금=18일 정오 계엄사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김종필 이후락씨등을, 사회혼란 조성및 학생·노조소요관련 배후조종자로 김대중 문익환 김동길 이영희씨등 26명을 연행조사중이라고 발표했다. 이른바 예비검속과정에서 총 2천6백99명이 검거됐다. 이중 김대중 한완상씨등 24명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로 육본 계엄보통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20일 상오 상도동자택에서연금됐다.
◇국회 점거·봉쇄=18일 상오 1시45분 33사단 101연대 소속 장교 사병 98명이 경장갑차 8대 전차 4대로 국회의사당에 진주했다. 20일 상오 의원등 3백여명이 국회로 들어가려 했으나 저지당했다.
▷광주 시위의 진압◁
◇계엄확대 이전= 5월3일, 9일 교내집회를 연데 이어 14일에는 전남대생 2천5백여명이 전남도청 앞에서 가두정치집회를 열었다. 같은 날 7공수여단은 전북대 충남대 전남대 조선대에 1개 대대씩 출동준비를 했고, 정웅31사단장은 광주소재 MBC KBS CBS에 병력을 배치했다. 15일 광주시내 대학생 1만5천여명이 전남도청앞에서 가두시위했고, 16일에도 대학생 3만여명이 도청앞에서 횃불시위를 했다.
◇계엄확대와 계엄군배치=광주지구보안대는 보안사의 지시에 따라 17일 하오11시부터 예비검속을 실시, 정동년 권창수 오진수등 재야인사 학생회간부등 8명을 체포했다. 18일 상오 1시10분 7공수여단 33대대는 전남대에, 35대대는 조선대에 각각 배치됐고, 광주지역 나머지 8개 대학에는 31사단 병력이 배치됐다.
◇5월18일=상오 10시30분께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대학생 1천여명이 금남로에서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시위했다. 시위대 해산에 실패한 경찰은 하오 3시50분께 전교사에 군병력 투입을 요청했다. 정웅31사단장은 7공수여단 33·35대대장에게 하오 4시 병력을 투입, 시위를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1개 공수여단의 증원을 지시했고, 정호용특전사령관이 지정한 11공수여단에 소요 진압명령을 내렸다.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는 시위대 2백73명을 체포했고, 진압과정에서 김경철(28·제화공)이 후두부 찰과상및 열상으로 다음날 상오 3시 사망했다. 이날 광주지역에는 「여학생의 유방을 도려냈다,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냈다, 경상도군인이 전라도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됐다.
◇5월19일=상오 9시30분 윤흥정전교사사령관이 1개 공수여단의 지원을 요청했다. 하오 2시 윤흥정전교사사령관이 연 광주지역기관장회의에서 기관장들은 「군의 진압이 너무 과격하다」며 연행자 전원석방과 명단공개를 요구했다.
하오5시께 동원예식장 부근에서 시위진압도중 첫 총격이 일어났다. 시위대가 11공수여단 63대대의 장갑차속에 불붙은 짚단을 던져 넣으려는 순간, 장교가 장갑차문을 열고 M16소총으로 위협사격, 김영찬(19·조대부고3)이 대퇴부에 총상을 입었다.
하오 6시께 광주공원에서는 수천명의 시위대가 모여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시위한 뒤 해산했다. 시위진압과정에서 김안부(남·36)가 사망했고, 군경 24명과 학생 시민 수십명이 부상했다. 이 가운데 최승기등 5명이 자상을 입었다. 육본은 이날 하오 11시8분 3공수여단에 광주투입 명령을 내렸다.
◇5월20일=상오 7시 3공수여단이 광주에 도착, 광주지역에는 공수부대 3개여단 10개대대가 투입됐다. 시위대들은 계엄철폐, 연행학생 석방, 공수부대 철수,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등을 요구했다. 하오8시50분께 광주시청이, 하오10시께 광주경찰서와 서부경찰서가 시위대에 점거되는 등 전남도청을 제외한 전지역이 사실상 시위대에 장악됐다.
하오 10시30분께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대대장들의 실탄지급 요청에 따라 경계용 실탄을 대대에 지급토록 지시했다. 밤 12시께 11공수여단 61, 62대대장은 실탄 15발정도가 든 탄창 1개씩을 중대장에게 분배했다.
하오 11시32분 광주시 외곽도로 봉쇄지시가 내려졌다. 밤12시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보병부대를 투입하고 공수부대는 시외곽으로 철수할 것을 건의해 승인을 받았다.<9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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