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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군 첫발포 “유혈의 서막”/5·18수사­발표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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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군 첫발포 “유혈의 서막”/5·18수사­발표요지

입력
1995.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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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시위대진압 총격전 40여명 사망/25일 광주재진입 결정 27일 작전개시/27일 국보위설치령 국무회의서 의결/최대통령 8월16일하야 전대통령 집권<8면에서 계속>

◇5월21일=광주교도소에 배치된 96연대 2대대병력에 상오 11시46분께 실탄이 공수됐다. 계엄사령부는 이날 상오 처음으로 광주일원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하오 4시 전교사령관에게 2개 공수여단의 작전통제권이 넘겨졌다. 상오 10시께 시위대대표 4명이 장형태도지사와 면담, 「공수부대 철수, 연행자 석방, 과잉진압 사과, 계엄사령관과의 면담주선」을 요구했다.

시위대는 인근 광산 영광 함평 화순등지의 파출소 경찰서등을 습격, 총기 4천9백여정, 실탄 13만여발, TNT 10여상자, 수류탄 2백70여발을 탈취했다. 시위대는 이를 광주로 들여와 하오 5시께 광주공원에서 총기사용 교육을 시킨 뒤 시위대에 배분, 이른바 시민군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하오 4시30분 전남도청 상황실이, 하오 5시15분 전남도경 상황실이 폐쇄됐고 경찰병력도 철수를 시작했다.

하오 4시30분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로 이동한 3공수여단이 연행한 시위대에 최루탄을 뿌리고 진압봉으로 구타하는 과정에서 연행자 수명이 사망했다.

한편 하오 2시에는 이계엄사령관, 각군 참모총장등이 참석한 국방부장관 주재회의에서 계엄군 외곽철수와 자위권발동이 최종 결정됐다. 하오8시30분 전교사령관이 예하부대에 자위권 행사를 지시했다.

이날 전남도청등 광주시내 일원에서의 시위진압과정에서 40여명이 총상으로 사망했다.

◇5월22일=계엄군은 0시40분께 광주교도소에 접근하는 시위대와 총격전을 벌여 3명을 사살했다. 상오 9시께 효천역부근에서 왕태경(26)씨를 시위대로 오인, 총격을 가해 왕씨는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상오 9시께 지역유지와 학생들이 시민수습 대책위원회를 구성, 사태추이와 수습방안을 모색했다. 하오 1시30분 수습대책위는 김기석 전교사부사령관을 만나 군투입금지등 7개항을 요구했으며 김부사령관은 무기를 반납하면 선별석방 하겠다고 약속했다. 2군사령부는 상오 10시30분 전교사에 자위권발동을 지시했고 코브라헬기 2대등을 배속했다. 하오 4시께 20사단 62연대 2대대는 광주통합병원확보를 위해 장갑차 3대를 선두로 이동하던중 무장시위대와 교전이 벌어져 시위대 8명과 계엄군 1명이 사망했다. 하오 5시50분 계엄군이 광주통합병원을 장악했다. 박충훈국무총리서리는 광주시내는 치안부재 상태라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5월23일=상오 10시께 주남마을앞에서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미니버스에 11공수여단 대원들이 집중사격해 박현숙(18·신의여상3)양등 10명이 사망하는등 광주교도소부근과 해남 황산만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25일 상오 2시 작전개시를 지시했다. 황영시 육군참모차장등은 코브라헬기로 조선대 뒷산에 위협사격을 해 시위대를 해산시키라고 전교사에 지시했으나 항공단의 반대로 무산됐다. 하오 4시 3,7,11공수여단의 광주비행장 집결등 계엄군 배치조정명령이 하달됐다. 학생수습위원회는 상오 9시30분께부터 무기회수활동을 벌여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이 하오 1시께 회수된 총기 2백정을 계엄분소에 반납하고 연행자 34명을 데려왔다.

◇5월24일=주남마을에 주둔해 있던 7, 11 공수여단에 광주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라는 전교사의 지시가 하달됐다. 상오 9시55분께 호남고속도로 광주인터체인지 부근에서 31사단 3대대 병력 장교 2명, 사병 29명과 전교사 기갑학교 병력간에 오인사격으로 96연대 사병 3명이 숨졌다. 하오 1시30분께 11공수여단이 효덕국교 삼거리부근에서 무장시위대 10여명과 총격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전재수(10·국교4)군등 2명이 숨졌다. 하오 1시55분께 선두 63대대가 효천역앞에 이르렀을 때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와 오인사격이 벌어져 63대대 병력 9명이 숨졌다.

수습대책 위원회가 상오 9시 총기 및 폭약회수등을 촉구하는 전단을 살포했고 학생 시민등 3만5천여명은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가졌다. 서울시경은 광주잠입을 시도하던 간첩 이창룡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5월25∼27일=25일 낮 12시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등이 참석한 가운데 27일 0시1분이후 전교사령관의 책임하에 광주재진입작전계획인 상무충정 작전을 실시토록 최종결정했다.

26일 하오 3시께 전남도청앞에서 시민궐기대회가 열렸고 2백여명이 도청사수를 위해 무장했다. 하오 6시께 도청내에서 마지막 수습위원 회의가 열린뒤 무기반납을 주장하는 측은 모두 도청을 빠져 나갔다.

하오9시께 전교사 문관 4명이 전남도청에 잠입, TNT, 수류탄등의 뇌관을 제거한뒤 하오11시께 진압부대가 작전을 개시했다. 3공수여단 특공조 66명이 27일 상오4시께 전남도청 후문을 통해 진입, 상오5시21분 도청점령을 완료했다. 7공수는 같은 시각 광주공원을 점령하고 11공수는 전일빌딩,YMCA빌딩등을 점령했으며 20, 31사단도 광주시내 전역을 장악했다.

이날 계엄군의 광주재진입 과정에서 양동선(47)씨등 17명이 사망하고 시위대 2백95명이 체포됐으며 계엄군 3명이 사망했다.

▷국보위 설치·운영◁

◇국가보위 비상대책 위원회의 설치=권정달 정보처장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을 성안, 5월27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첫 전체회의에서 상임위원장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임명됐다. 국보위는 공직자 8천6백1명을 사임시키고 대입본고사폐지등 교육정상화 방안을 발표했으며 3만8천2백59명을 삼청교육에 회부했다.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최대통령은 6월12일 특별담화를 통해 「10월말까지 개헌안 국민투표 회부, 81년 상반기중 선거실시, 6월말까지 정권이양」이라는 국정계획을 밝혔다. 전두환 국보위상임 위원장은 8월11일 뉴욕타임스 회견에서 『한국은 군부의 지도력과 통제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대통령은 8월16일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권=전두환장군은 8월22일 예편한뒤 27일 제7차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0월22일 확정 공포된 5공 헌법개정안에 의해 1981년 2월25일 실시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유효투표의 90.2%를 얻어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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