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여론 잘알아… 신진인사 적극 영입계획/국민·국가 도움된다면 김대통령 만날 생각김대중 이사장은 18일상오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계복귀를 선언한 뒤 복귀배경과 향후 정치행보등에 관해 20여분간 일문일답을 가졌다.
―정계복귀로 「무엇이 되는 것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소신이 바뀐 것은 아닌가.
『바뀐 것이 아니다. 신조에 따라 고통스런 결단을 내린 것이다』
―97년 대권에 도전할 의사는. 또 신당총재 추대론에 대해선.
『대선출마나 총선출마는 아직 결정된 바 없고 생각을 정리한 바도 없다. 대통령은 하늘의 뜻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좋은 당을 어떻게 만드느냐만이 목표다. 신당에서의 역할은 창당과정에서 결정될 것이다』
―신당의 총재가 되면 김대통령과 면담할 의사가 있는가.
『면담이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 도움이 된다면 만날 생각이다. 지금까지 통일문제를 얘기해 보고 싶다고 여러차례 제의했으나 불행히도 만나지 못했다. 나라일을 위해 서로 협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론조사결과 신당반대 여론이 70%를 넘는데.
『여론이 불리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는 정계복귀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도 있고 신당을 창당하는데 대한 의문도 많다. 그러나 오늘 회견을 출발점으로 나의 충정과 필요성을 이해하게 될것으로 본다』
―신당이 지향하는 권력구조는.
『개인적으로는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한다. 그러나 내년 총선에서 나타날 민의를 겸허히 경청, 필요하면 태도를 바꿀 수도 있다』
―지역할거주의의 극복대책은.
『등권주의는 모든 지역이 똑같이 권리를 누리자는 것이다. 지자제선거 자체가 등권주의를 하자는 것임으로 할거주의란 말은 있을 수 없다』
―민주당이 전당대회에서 새지도부를 구성하면 야권통합차원에서 끌어안을 것인가.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새정치가 필요하다. 주도역할은 30, 40대 젊은층과 중산층 여성들이 해야 한다. 중산층 정당으로 안정속에서 개혁과 발전을 추구할 것이다』
―1인정치의 폐해를 지적하는 의견이 많은데.
『나는 민주적인 당운영에 누구보다 애써왔다. 민주적 리더십과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필요한 당직에 선거제도를 과감히 도입하겠다』
―자민련 김종필총재와 연대의사와 정국전망은.
『정국전망에 대해선 아직 말할 계제가 아니다. 자민련등 야당과는 공동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연합할 것이다. 김대통령이 너무 유아독존식으로 야당을 무시하고 있어 이런 일을 해야 한다』
―외부인사 영입 원칙은.
『과거 군사정권에 참여한 사람이라도 과거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에 협력하겠다고 하면 선별적으로 수용하겠다. 그러나 영입의 핵심은 때묻지 않은 전문직업인, 중산층 기업인, 봉급자, 여성등 30∼50대의 신진인사들이다』<유성식 기자>유성식>
◎DJ-KT 동거·결별일지
▲91년9월10일=김대중(DJ) 신민당과 이기택(KT) 민주당 통합
▲92년5월25∼26일=전당대회서 DJ를 대통령선거 후보로, DJ·KT 공동대표 선출
▲92년12월19일=DJ 정계은퇴선언
▲93년1월26일=DJ 영국으로 출국
▲93년3월11일=KT 전당대회서 당대표로 선출
▲93년7월4일=DJ 귀국
▲93년9월4일=DJ 직계 내외문제 연구회 창립
▲94년1월27일=DJ, 아태 평화재단 창립및 이사장 취임
▲94년12월2일=민주당, KT 등원거부 방침에도 등원결정
▲95년1월9일=KT, 조기 전당대회 안되면 대표사퇴 언급
▲95년2월24일=KT, 전당대회서 총재로 선출
▲95년4월26일=DJ 경기지사 후보로 이종찬고문 추천, KT 장경우 공천 강행
▲95년5월13일=경기지사후보 선출과정서 돈봉투시비및 폭력사태
▲95년6월5일=DJ―KT 회동, 경기지사에 장경우 공천 결정
▲95년7월11일=DJ측 신당창당 밝히며 중지조건으로 KT 사퇴요구
▲95년7월13일=DJ, 내외연모임에서 정계복귀 선언
▲95년7월18일=DJ, 정계복귀및 신당창당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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