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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되겠다고 부처님께 약속했죠”(나는 살고 싶다:하·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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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되겠다고 부처님께 약속했죠”(나는 살고 싶다:하·끝)

입력
1995.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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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엄마 손쥐고 “미안해요”/실종자 행방 물어올땐 안타까움만 더해/구조후 두번째 아침은 “살아있음의 축복”구조후 두번째 맞는 아침이다. 몸도 가뿐하고 머릿속도 말끔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다. 꿈인지 생시인지 얼떨떨했던 첫날 아침과는 달리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제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면 오늘부터는 살아있음을 축복하는 시간이기 때문일까.

엄마는 내가 어제보다 훨씬 생기있는 게 그렇게 반가운 모양이다. 얼굴에서 걱정스런 모습이 많이 사라진 것같다. 그래도 까칠함은 남아있다. 『내가 잠든 어젯밤에도 내내 대기실에서 새우잠을 잤을 거야』 살포시 엄마의 손을 쥐었다. 『엄마, 미안해요……』

친구 혜진이가 조간신문과 핑크빛 곰인형을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모든 신문에 내 이야기가 가득했다. 혜진이와 나의 우정얘기. 우리 가족얘기, 여고시절얘기 등등. 기사들이 한결같이 나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았다. 실제보다 훨씬 예쁘게 나를 묘사한 바람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군대에 가 있는 친구를 마치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인양 사진까지 실은 한 조간신문의 기사에는 언짢은 느낌도 들었다. 『남의 집 귀한 딸 혼삿길 막으려고……』 엄마는 조금 흥분하셨지만, 『여자는 어쨌든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금 새기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혜진이가 열통이 넘는 편지를 내게 건네줬다. 내가 갇힌 그날부터 구조된 날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쓴 편지라고 했다. 「이 세상 하나뿐인 내친구 승현아. 다시 살아 돌아온 너의 큰 눈망울을 잠시동안이라도 볼 수 있어 난 너무 행복해」「친구란, 이 세상 사람이 모두 내곁을 떠나도 나를 찾아오는 사람…」 눈물이 핑 돌았다. 『혜진아, 정말 고마워』

혜진이는 친구 정원이의 안부인사도 함께 전해주었다. 매몰돼 있으면서 백화점에서 함께 일했던 정원이 소식이 그토록 궁금했었는 데. 정원이는 다행히도 일찍 붕괴현장을 빠져나와 많이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

혜진이와 재잘대는 나를 저만큼 서서 지켜보고 계시는 아버지 얼굴을 보니 그제서야 휴가 생각이 났다. 『아빠, 자동차 사셨어요? 운전연습은 좀 하셨나요?』 아버지는 내가 사고를 당하기 얼마전 몇차례 미끄러진 끝에 운전면허를 따셨고 이번 여름휴가는 손수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바닷가로 여행하자고 말씀하셨었지.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잃어 정신이 없는데 자동차는 뭐고 운전연습은 또 뭐냐』 아버지는 이렇게 핀잔을 주면서도 빙그레 웃으셨다.

하오가 되니 삼풍직원중 실종자의 가족들이 방문했다. 같은 층에서 함께 근무하던 동료들의 행방을 물어왔지만 시원스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안타까움만 더해줬을 뿐이다. 한가닥 희망을 갖고 찾아 온 그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것을 보니 절로 눈물이 나왔다.

『희망을 잃지 마세요. 못난 저도 이렇게 살아나온 걸요. 틀림없이 또다시 기적이 있을 거예요』 위로의 말이 목끝까지 차 올라왔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다.

엄마는 종일 병수발하랴 손님 맞으랴 무척 피곤하신 모양이다.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묻고 계시는 데 살짝 잠이 드신 것 같다. 엄마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엄마, 승현이가 콘크리트 더미속에서 무슨 생각을 한 줄 아세요. 살아나가기만 하면, 다시 엄마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정말 잘할거라고 부처님께 약속했어요. 부모님께 효도하는 딸이되고, 오빠에게는 사랑스런 여동생, 동생에게는 멋진 누나가 되리라고 얼마나 다짐했는지 몰라요』<정리=장학만·윤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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