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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탈출 박승현양 지옥의 3백77시간(나는 살고싶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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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탈출 박승현양 지옥의 3백77시간(나는 살고싶다:상)

입력
1995.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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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환호소리 아직 아련히…”/주변신음 하나둘 끊기자 두려움 엄습/죽음그림자 너머로 어머니얼굴이…/천장내려앉아 체념순간 빛쏟아져어둠속의 3백77시간을 물한방울 먹지 않고 견뎌 낸 박승현양.

꺾이지 않은 삶의 의지는 두번의 기적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구조당시에도 의료진이 깜짝 놀랄 정도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던 박양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고립무원의 공간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았던 박양의 눈물겨운 사투와 구조 이후의 심정을 두차례에 나눠 수기형식으로 정리한다.<편집자주>

악몽을 꾼 것도 아닌 데 새벽녘에 몇번이나 잠을 깼다. 환호소리가 귀에 아련하다. 간호사 언니가 다가와 혈압과 맥박을 쟀다. 『살아있구나』

커튼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눈부셨다. 목이 탄다. 시원한 포도주스를 마시고 싶다. 사고 나던 그날도 이렇게 목이 말랐었는데….

29일 하오 5시50분. 5층 식당가 바닥이 4층으로 무너져 내렸다는 소문이 알려진지 서너시간이 지났을 때다. 매장 언니들은 간식을 먹으러 먼저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양쪽 계산대를 부지런히 오가며 계산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에어컨이 꺼지는 바람에 매장안은 몹시 더웠다. 갈증이 나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았다. 한 모금 마시고 매장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피해라』 『천장이 무너진다』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자세한 영문도 모른 채 있는 힘을 다해 엘리베이터쪽으로 달렸다. 몇걸음이나 뛰었을까. 눈앞에 놓여있던 바닥이 『꽝』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앉았다. 순간 쇳덩이 같은 것이 머리를 때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이 저절로 떠졌다. 온 주위가 캄캄하다. 숨이 턱 막힐 만큼 먼지가 자욱하다. 손을 뻗어 주변을 짚어보니 어느정도 공간이 있었다. 좌우로 구를 수 있을 정도였다. 『살려주세요. 거기 아무도 없어요』 대답이 없다. 공허한 메아리만 어둠속에서 되돌아왔다.

10여분쯤 지났나. 이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왔다. 머리 위쪽에서 들리는 힘없는 신음소리는 3층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박해정 언니의 목소리였다. 『언니』하고 외치자 해정언니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승현아 살려줘. 몸이 움직이지 않아』 많이 다친게 틀림없었다. 소리나는 쪽으로 조심스레 기어갔다. 철판인지 콘크리트 더미인지 막혀있었다.

해정언니는 계속 나를 애타게 찾았다. 『언니, 더 이상 갈수가 없어요』 1시간 정도 해정언니의 신음소리가 이어지더니 갑자기 『헉헉』거리며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언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엉엉 울었다.

다른 목소리들도 있었다. 아동복 매장에서 근무하는 문경분 언니였다. 경분언니는 같은 매장에서 일하던 이명은 언니를 애타게 찾았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깨어났으니 하루쯤 지났을까. 경분 언니의 목소리마저 이젠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나 혼자 남았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한참을 기어다니다보니 손에 무엇인가 잡혔다. 30㎝쯤 되는 쇠파이프였다. 혼신의 힘을 다해 쇠파이프로 구멍을 뚫어 보려했다. 금세 힘이 빠졌다. 또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다. 손바닥이 차갑다. 물이었다. 『똑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손으로 물을 받아 먹으려 했으나 역한 냄새가 났다. 목이 타들어가는 데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스타킹을 벗어 물에 적셨다. 머리에 뿌리고 몸에도 뿌렸다. 조금 시원하니 살 것 같았다. 옷에 유리파편들이 묻어 있는지 살갗이 아려왔다. 입고있던 옷들을 모두 벗어던졌다. 조금 시원해진 것 같았다. 기분도 나아지는 듯했다.

숨이 막혀 갑자기 잠에서 깼다. 위쪽에서 불길이 보였다. 다행히 연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뜨거운 기운이 숨을 조여왔다. 필사적으로 차가운 곳을 찾았다. 그러나 콘크리트 더미 밖에 만져지지 않았다. 또 얼마나 지났을까. 머리위에서 『꽝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조대원들의 목소리도 뚜렷하게 들렸다. 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였다. 『살려달라』고 외치며 쇠파이프로 벽을 힘껏 두드렸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삶은 저만치 달아나고 죽음은 자꾸만 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탐스런 사과를 내 손에 쥐어줬다. 『고맙습니다. 스님』 눈을 뜨니 손에는 쇠파이프만 들려있다. 꿈이었다. 스님이 내게 사과를 주다니. 꿈속에서 스님을 만난 지 하루가 지났을 거다. 이제 정말 지쳤다. 자꾸만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 보고 싶어요. 살아나가 엄마품에 안기고 싶어요』

갑자기 『땅 땅 땅』 소리가 들렸다. 포클레인 소리다. 내가 있는 곳을 찍어내리는 것 같았다. 『이제 살았구나』 그런데 천장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내가 있는 걸 모르는 구나. 이렇게 죽는단 말인가』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벽이 활짝 벌어졌다. 열린 틈으로 빛이 쏟아졌다. 플래시 불빛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다.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마구 소리쳤다. 『곧 구해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구조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내가 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플래시를 비치지 말고 옷을 주세요』 <정리=박희정·조철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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