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남에게 베풀며 열심히 살래요”/살아있음의 소중함 깊이 느껴/가족·친구들 함께 또다른 시작빛을 본지 5일이 지났다. 일요일인가 보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잠에서 깼다. 어젯밤 꿈속에서는 바다와 친구들을 보았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코끝을 스치는 바다냄새, 뜨겁게 내려쬐는 태양. 사랑하는 내 친구들. 미선, 희정, 한옥, 재이, 정미, 현숙이.
○고통스런 기억 저멀리
손에 손을 잡고 맨발로 백사장을 걸으며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없는 이 곳에……』 멋들어 지게 노래도 부르고 물장난을 하면서 깔깔댔다. 갇혀있는 동안 꿈을 꿀 때마다 나를 괴롭혔던 공포의 장면은 나타나지 않았다. 인간은 환경에 따라 꿈도 다르게 꾸나보다. 고통스러웠던 매몰 13일은 어느 사이에 기억 저편으로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끝내 놓지 않도록 나를 지켜준 수많은 얼굴들. 가족과 친구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 이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늘 해맑게 웃던 희정이, 새침데기 한옥이 등등 그리운 얼굴들이 암흑 속에서 힘이 되었었다. 태어나서 친구들과 떠난 첫 여행. 지난 여름 강릉바닷가에서의 추억을 되새기니 콘크리트 더미에 짓눌렸던 가슴이 탁 트여 오는 것만 같다.
우리는 발가락사이로 스며드는 모래알의 보드라운 촉감을 느끼며 밤새워 바닷가를 거닐었었지. 꼭꼭 다져가며 함께 쌓았던 모래성에 우정을 새겨넣기도 하고.
퇴원하면 좋은날을 잡아 여행을 떠나고 싶다. 살아있음을 한껏 누릴거다. 어제 꿈처럼 친구들과 해변을 다시 거닐고 노래도 부르고. 지난 여름보다 더 멋진 추억을 만들거다.
일반병실로 옮긴 뒤로는 자꾸 문쪽으로 시선이 간다. 『지환아, 그동안 많이 보고 싶었어』 『얼마나 무서웠니』하며 군복을 입은 형(?)이 들어올 것만 같다.
병영의 어디선가 신문이나 TV를 통해 지금의 내모습과 소식을 알고있을 것이다. 어리기만했던 내가 죽음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렇게 당당히 살아왔다면 뭐라고 할까. 지금은 애틋한 감정의 색깔은 많이 옅어졌지만 사춘기에는 내 마음을 무척이나 설레게 했던 형. 순전히 형 얼굴보려고 서클모임에 나가기도 했었는데. 『형, 사실은 말이야, 나 갇혀 있으면서 몇번이나 형 얼굴을 그려보았더랬어』
○절망속의 「희망의 끈」
오늘 그동안 그리웠던 친구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이얘기 저얘기 그동안 못했던 말들을 줄기차게 떠들어 댔다. 하도 수다를 많이 떨어 가슴이 저려 올 정도였다. 그래도 속은 시원하다. 갇혀있던 동안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 두려웠던 것이 바로 혼자라는 외로움이었다.
『말짱하구나』 『어디 멀리 놀러갔다온 사람같애』 친구들은 정신없이 재잘거리는 내 모습을 보면서 우스갯소리를 했다. 『너희들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건지 모를거야. 난 지금 살아있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 거야』
하루라도 빨리 퇴원해서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냉커피도 마시고 햄버거집에 들러 치킨버거와 콜라도 먹고…. 노래방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서지원의 「또 다른 시작」을 백번정도 부를래. 그러면 친구들이 노래제목처럼 됐다고 박수쳐 주겠지.
○퇴원후 여행하고 싶어
어제 점심 때에는 나하고도 안면이 있는 박승현이가 구조돼 너무 기뻤다. 그가 살아나왔다는 소식을 들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현이가 내 옆의 침상에 실려 왔었다. 내가 구조됐을 때보다 건강하다니 참 대단한 친구다. 손을 잡고 빨리 쾌유하길 빌었다. 퇴원하면 함께 돌아다녀야지. 저녁뉴스에는 시신발굴 소식만 들려왔다. 불현듯 희정언니 생각이 나 마음이 다시 저려온다. 힘든 매장근무를 하면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날 격려해주던 언니였는데. 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만난 제일 좋은 사람이었는데… 사고 직전 지하식당가에서 저녁을 먹고 올라오다 눈인사를 한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누군가 머리맡에 놓고간 편지지를 꺼냈다.
『희정언니 읽어보세요. 언니, 이제 편안하시죠. 언니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 곳에서도 행복하게 살고 있을거라 믿어요. 저도 괜찮아요. 부모님도 친구들도 모두 기뻐하고 있어요. 끔찍했던 시간을 겪은 탓인지 스스로 생각해도 제자신이 많이 변한 것 같아요. 내 주변사람들의 소중함도 알게되었고 사랑이란 말의 의미도 조금은 깨달았어요. 언니처럼 남들에게 베풀 줄 알고 작은 것도 사랑할 수 있는 지환이가 될게요. 아직 몸이 완전치 않은가 보네요. 별로 쓴 것도 없는 데 힘이 많이 들어요. 오늘은 그만 쓸게요』 <정리=박희정·장학만 기자>정리=박희정·장학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