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의 지자체선거는, 바로 이어진 삼풍의 태풍 때문에 그 빛이 바래는 듯 했지만, 이제 「DJ신당」의 태동과 함께 그 의미하는 바가 서서히 가시화하고 있다. 엄밀히 따진다면 지방자치제선거는 각 지역의 살림꾼을 그 지역 사정에 가장 밝은 주민들이 직접 뽑는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거는 마치 각 지역이 중앙정부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여 「지역주권」을 확립하는 계기처럼 선전되어 흡사 연방제로 나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물론 이 점은 전혀 환영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기성 정치구도에 대해 별로 관여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일반국민의 입장에서는 비록 지방선거도 선거인 만큼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나름대로 뜻있게 행사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결과를 굳이 부정적으로 평가할 일만은 아니다.
싫든 좋든 이번 선거의 결과 소위 「3김구도」와 지역주의의 결합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선거를 전후해 이미 많은 이들에 의해 우려된 것처럼 한국정치는 마치 1980년대로 복귀한 듯한 느낌마저 준다. 실제 지난 10년간처럼 한국사회가 급변한 적이 없다는 일반적 평가를 생각할 때 정치시계는 오히려 거꾸로 가는 듯 하여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이것이 과연 국민의 뜻일까?
민주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기대를 주고 있지만 대중민주주의 상황에서 보통시민들이 실제 할 수 있는 정치참여는 선거시 주어진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 전부다. 시험에 비유해 말한다면 논술식은 고사하고 단답형도 못 되고 오로지 두 세가지 답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주어지는 선택지중 아무것도 정답이 아니라고 믿는 경우에도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개인적으로 선택을 포기한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일도 없다. 결국 한 나라의 정치의 질은 국민한테 주어지는 선택지의 질에 따라 결정된다. 이 선택지를 만드는 일은 정치권에 부여된 권리이자 의무로 되어 있다. 원론적으로는 개인들의 삶의 현실과 직결되는 각종 정책에 관해 선택지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어디 실제가 과연 그런가?
이번 지자체선거로 지역주의에 바탕을 둔 「3김구도」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는 말은 앞으로 당분간 우리 정치에서 주어질 선택지의 내용이 사회현실과 무관하게 개인을 중심으로 정해질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한국정치의 낙후성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 보다 정확히는 쟁점의 정치가 부재한 우리 사회의 본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는 점에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해온 주요한 기능 중의 하나는 마치 스포츠경기처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싸워 이길까 하고 궁금해하는 관중으로서 국민을 항상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문제는 관중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비싼 관람료가 지불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엔터테인먼트로서 정치의 역할에 몰두해 있는 동안 우리 사회는 그동안 덩치만 커지면서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공맹의 이상정치 수준이 아니더라도 정치인들은 마땅히 급속한 사회변화가 혼란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그 변화에 방향과 질서를 부여하여 국민 각자가 도덕적 균형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럴 의사도 능력도 없으면서 남을 지도하겠다고 나선다면 국민으로서는 지극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몇십년간 계속 같은 선택지만을 강요함으로써 국민에게 환멸감만을 안겨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대안이 없는가? 앉아서 기다리는 한에서는 아무런 대안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다리는것 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마치 선택형으로 주어진 문제를 무시하고 주어진 문제를 평가하고 나와 합격을 기다리는 수험생같은 처지가 아닌가? 그러나 수험생들이 조직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새로이 만들어진 문제에 모두가 논술형 답안을 쓰고 나온다면 시험관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할까?
문제는 누가 과연 그런 과감한 반란을 조직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 동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만일 이러한 작업이 새로운 지도자들에 의해 추진되고 국민에 의해 동조될 수 없다면 주어지는 선택지에 대해 어떤 이유에서든 아무런 불평도 말아야 할 것이다. 사회와 국민은 선진화했는데 정치만이 유독 낙후되어 있다는 말은 시장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선거―민주주의체제에서는 더 이상 큰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점을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이다.<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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