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디어 빛이 보인다”/종이상자 뜯어먹으며 굶주림 달래/칡흑속 공포 “희망잃지 말자” 버텨/함께 견디던 두여인 숨지자 절망감『살려주세요. 여기 사람있어요』 우울하게 젖어있던 일요일 아침, 전국을 돌연 생명의 활력으로 채우고 절망으로 무너져 가던 실종자 가족들을 다시 일으켜세운 한마디였다. 2백30시간만에 사지를 벗어난 최명석(20)군은 가벼운 찰과상과 약간의 탈수현상만 보일뿐 믿을 수 없을 만큼 건강했다. 최군이 기자에게 들려준 기적의 생존드라마를 정리해 소개한다.
▷붕괴순간◁
29일 하오 5시께 친구 이강선(20·용인대 물리치료2)이가 백화점 매장으로 찾아왔다. 마침 간식시간이라 완구코너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고 있는 애인 유정화(21)와 함께 지하 3층 식당가로 내려갔다.
라면으로 출출한 배를 채운 뒤 일과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지하 1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매장에 다다르는 순간 갑자기 「쉬이」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폭풍이 몰아쳤다. 건물이 흔들렸다. 천장에서는 콘크리트조각들이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사람살려…』 『사람살려…』 매장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살아야 한다. 갇히면 죽는다』 비상구쪽으로 마구 내달렸다.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가 「쿵」하고 떨어지더니 길을 막아버렸다. 눈앞이 아찔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칠흑같은 어둠이 감싸고 있었다. 어디서 불이 났는지 주위의 콘크리트더미가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뒤통수가 아려왔다. 손을 대보니 끈적끈적한 것이 느껴졌다. 『피구나』 그러나 다른 데는 다친 곳이 없었다.
다리를 겨우 펼 수 있고 고개를 숙이면 가까스로 앉아있을 만큼의 공간만이 전부였다. 무서웠다.
▷매몰자와 대화◁
콘크리트 더미 건너쪽에서 사람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목소리였다. 『누구세요. 살아있군요』 얼굴을 몇번 마주친 적이 있는 백화점 여직원 이승연씨 였다. 다른 한사람은 1남3녀를 둔 아주머니라고 했다.
『구조대원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요』 두사람에게 용기를 잃지 말자고 말했다. 그러나 두사람은 쉬지 않고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바닥에서 물이 차오르고 있어요』 『아, 너무 힘들어요』 두사람은 많이 다친 것 같았다. 『우리 희망을 가져요』 나는 나 스스로에게 희망을 버리지 말도록 다짐을 하며 두사람을 위로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됐다.
두번의 낮과 밤이 지나갔을까. 건너편에서 「꼴깍꼴깍」하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먼저 갑니다. 내 소식을 꼭 전해주세요』 이승연씨의 가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주머니는 집전화번호를 일러줬다. 그리고는 조용해졌다. 『두사람이 모두 죽었구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참동안을 숨죽여 울었다.
▷홀로 남아서◁
이제 혼자였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했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좀더 기다리자. 구조대가 틀림없이 올거다』 구조의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두사람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바닥에서 뜨거운 물이 차올랐다. 잔해의 틈새로 매캐한 연기가 새들어왔다. 양말에 물을 적셔 코를 막고 있는 힘을 다해 호흡을 참았다.
비가 오는 지 콘크리트 위에서 찬물이 떨어졌다. 윗옷을 벗어 물에 적신 뒤 빨아 먹었다. 그야말로 「생명의 물」이었다. 조금씩 정신을 차릴 수 있었으나 배고픔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옆에 종이사과박스가 보였다. 뭐든지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박스종이를 뜯어 먹었다.
죽음이 이제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예쁜 추억만을 그려보기로 했다. 보고 싶은 얼굴들을 하나씩 떠 올려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정화야! 강선아! 슬픔을 억누르며 나를 찾고 있을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니 또 눈물이 쏟아졌다.
▷절망◁
스피커 소리인지 라디오 소리인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오늘 하오 5시부터 구조작업을 끝내고 본격적인 잔해제거작업을 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구조되기 하루전쯤이었을 거다. 『아 이제 끝장이구나』 절망감에 빠졌다. 한꺼번에 희망과 기대가 사라졌다. 온 몸에 힘이 쑥 빠져나갔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잠을 자기로 했다. 『잠든 채 이렇게 그냥 죽어버렸으면…』
▷빛이 보인다◁
바로 오늘이다. 눈이 저절로 떠지면 다시 잠을 청하기를 몇번. 얼마나 많은 잠을 잤을까. 갑자기 눈을 떴다. 『아 빛이 보인다』 지름 30㎝정도되는 틈새로 한줄기 빛이 들어왔다. 위쪽에서 돌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면서 남은 힘을 다해 『사람살려』소리를 힘껏 내질렀다.
쇳조각을 주워 주위의 쇠판을 두드렸다. 『여기 사람있어요』 외치는 소리가 들렸는지 곧바로 손전등 불빛이 스쳐지나갔다. 위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구조대원이 누구냐고 물었다. 내이름과 나이를 알려줬다. 『살았구나』
한시간정도 흘렀을까. 마침내 위에서 지름 50㎝정도의 구멍이 뚫렸다.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내밀었다. 구조대원의 땀에 전 손이 잡혔다.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구조대원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밖으로 나온 뒤 「꿈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빛을 보고 싶었다. 얼굴을 통째로 가린 수건이 답답했다. 그러나 두툼한 수건의 틈새로 가느다란 빛이 마침내 눈에 들어왔다. 구급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김성호 기자>김성호>
◎용돈벌어 부모에 선물 “효자”/기적의 주인공 최명석군/“농구광에 다부진 체격 의지 강해”
기적같은 생환드라마의 주인공 최명석(20·수원전문대 건축설계학과 2년 휴학)군은 평소 적극적이고 낙천적인 성격, 「농구광」으로 알려질 정도의 단단한 몸으로 매몰 11일간을 거뜬히 이겨냈다.
75년 4월30일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서 아버지 최봉렬(51·웅진코웨이 종로지부장)씨와 어머니 전인자(49)씨의 2남1녀중 막내로 태어난 최군은 중산층 가정의 평범하고도 자율적인 집안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형 태석(25·사업)씨의 옷을 물려 입으면서도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을 만큼 심지가 곧았고 올 어버이날에는 삼풍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부모에게 모시잠옷을 선물한 효자였다.
고교성적이 중간정도였던 최군은 가족의 과외권유를 뿌리쳤다. 지난해 대학입시에 실패하자 『재수보다는 곧바로 실무기술을 배워 사회에 기여하겠다』며 수원전문대 건축설계학과에 입학했다.
1학년을 마친 뒤 군입대를 위해 휴학한 최군은 『사회생활을 직접 배우겠다』며 3월초 삼풍백화점 지하 1층 수입신발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는 『대학생은 휴학하더라도 공부를 해야한다』며 말리는 아버지를 『부모님 마음은 알지만 남자는 모든 경험을 다 해봐야 한다』며 설득해 승락을 얻어낼 만큼 건강하고 자신있는 젊은이였다.
178, 65㎏의 건강한 체격인 최군은 평소 집에서 헬스기구로 운동하는 등 각종 스포츠에도 재능을 보였고 특히 농구명문인 용산고 출신답게 농구를 몹시 즐겼다.
가족과 친구 등 주위사람들은 한결같이 『명석이는 주관이 뚜렷하고 쉽게 좌절하지 않는 강한 성격이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포기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박일근 기자>박일근>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