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억척 「또순이」로 살았는데…/맹렬주부 등 희생많아 슬픔은 더하고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억척 「또순이」로 살았는데…/맹렬주부 등 희생많아 슬픔은 더하고

입력
1995.07.06 00:00
0 0

◎실종 삼풍여직원 20여명 맞벌이/카자흐 대통령 고문 방 박사 “아내에게 눈물의 헌사”/“13평집 사 좋아하더니” 남편 통곡○…삼풍백화점 붕괴참사로 실종된 사람중에는 또순이처럼 억척스럽게 매장을 장만해 운영하던 30∼40대의 커리어우먼들과 맹렬 미혼여성, 맞벌이 부부등이 많이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A동건물 2층숙녀부 「모다조바니」를 운영한 김정희(41·강서구 가양동)씨는 미대를 졸업한후 공방생활을 거쳐 의류업계에 투신, 5년만에 업계에서 「알아주는」 재원으로 발돋움한 「또순이」였다. 독신인 김씨는 지난해 9월 3년간 활동해온 압구정동 지점에서 삼풍백화점으로 거점을 옮겨 독립, 연예인 못지않은 미모에 탁월한 디스플레이어 감각으로 많은 고객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3층 (주)템포직영점인 「지방시」매장의 점장인 김은경(31·강남구 일원동)씨는 통상 10년 경력자도 오르기 힘든 점장의 자리에 경력 6년만에 오른 맹렬 미혼여성인 것으로 밝혀졌다. 김씨는 단정한 매너에 남다른 책임감으로 점장을 맡은지 불과 9개월만에 매장매출을 다른 백화점내 직영매장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등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백화점 직원 실종자중 맞벌이 여성들이 20여명이나 돼 가족들의 애간장을 녹이고 있다. 사고직후 현장과 병원영안실을 오가며 「내 아내」와 「내 어머니」를 찾아다니다 지쳐버린 남편과 아이들은 하늘만 바라보며 눈물짓고 있다. 붕괴된 A동건물 5층 식당가 「식도락」에서 주방일을 보다 실종된 문영님(56·종로구 삼청동)씨는 두부배달을 하는 남편 김진부(60)씨와 맞벌이로 4남매를 길러낸 억척여성이었다. 문씨는 매일 상오 7시에 집을 나가 하오 11시에 퇴근하는 힘든 주방일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집안일을 이끌어 왔다. 지난 3월 새로 이사간 집이 고지대여서 지친 몸을 이끌고 아침저녁으로 언덕길을 오르내려야 했지만 『꿈에도 그리던 넓은 집에 살게 됐다』며 마냥 기뻐했던 문씨였다. 문씨는 『집을 늘리면서 빚까지 졌는데 일을 쉴 수 없다』며 『식당일을 그만하라』는 자식들의 권유를 마다했다.

○…니시가와 육아용품매장 직원 진인숙(41)씨는 10년전 사업을 하던 남편 김태옥(49)씨가 부도를 낸 뒤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억척스럽게 살아왔다. 매일 상오 5시에 일어나 밤 12시 잠자리에 들때까지 매사에 충실했고, 가족간의 화목을 다지는 데도 모범을 보였다.

남편 김씨는 『지난 2월 13평짜리 연립주택을 마련하고 그렇게 갖고싶어 했던 대형냉장고까지 사놓았는데 이렇게 소식조차 없다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씨는 『결혼한 후 단둘이 여행한 적이 한번도 없어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다 지난달 6일 1박2일동안 동해안을 여행했는데, 그것이 마지막 여행이 될줄 누가 알았느냐』고 오열했다.

진씨의 1남2녀들은 『엄마가 냉장고를 새로 구입한뒤 「죽을 때까지 써야하니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고 했던 말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며 『저승에 가시더라도 고생없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흐느꼈다.

○…이우형(33)씨는 A동 지하 1충 아동복 「엘르」코너에서 근무하다 참변을 당한뒤 아직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레이스 백화점에서 근무하다 집과 가까운 삼풍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긴지 15일만에 변을 당했다.

이씨의 시아버지 이기채(63)씨는 『힘든데 그냥 집에서 쉬라고 해도 휴일마다 당뇨병을 앓는 시부모를 찾아올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며 『시부모를 끔찍하게 잘 모셔 며느리보다 딸이라고 생각하고 귀여워 했는데, 억장이 무너진다』고 울먹였다.

○…시신 발굴작업이 본격화하며 실종자가 잇따라 사망자로 확인되자 실종자 가족 안내소가 마련된 서울교대 체육관 주변에는 가족들의 오열로 울음바다를 이뤘다. 실종된 동생을 찾던 언니 김모(32)씨는 체육관앞 무료전화 이용소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전화로 어머니에게 『지문채취 결과 우리애가 맞대요』라고 알리며 울부짖어 주위 가족들이 잠시 걸던 전화를 멈추고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영구귀국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부인과 아들 딸등 일가족 3명이 실종된 카자흐스탄 대통령 경제고문인 방찬영(60) 박사는 10일 프레스센터에서 갖기로 한 출판기념회를 무기연기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교수를 지내고 카자흐스탄 경제개혁 정책의 핵심브레인으로 활동하다 북한연구에까지 관심분야를 넓혀 최근 「기로에 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박영사간)을 출간한 방박사는 이 행사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심려를 끼칠 것 같다며 출판기념회를 연기했다.

부인 송인숙(50)씨와 아들 재선(13),딸 찬숙(19)양등 일가족의 구조소식을 기다리며 매일 사고현장으로 달려가는 방박사는 「저자의 평생 동반자인 송인숙에게 바친다. 그녀의 끝없는 격려와 관대한 아량이 없었던들 이책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며 이 책에 눈물의 헌사를 추가했다.<김성호 기자>

◎동생 등록금 마련꿈이…/아르바이트 10일만에 참변 정혜원양

『사랑하는 딸아 천당에 가서 행복하게 지내거라』

삼풍백화점 붕괴참사로 딸을 잃은 정영모(47·경기 광명시 하안동)씨는 5일 하오 2시30분 백화점 매몰현장에 국화꽃 1백송이를 던졌다. 그리고는 『능력이 없어 딸을 숨지게 했다』고 자책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동덕여대 아동학과를 다니던 큰딸 혜원(20)양은 방학을 맞아 동생들의 등록금을 보태기 위해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의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10일만에 참변을 당했다. 아버지가 노동일을 하고 어머니 김봉자(45)씨는 파출부로 일하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 혜원양은 줄곧 장학생으로 뽑혀왔지만 고등학생인 동생들의 등록금을 항상 걱정해 왔다.

3일 벽제에서 딸의 시신을 화장한 후 실의에 빠져 집에 누워있던 정씨는 딸이 근무하던 백화점을 찾아 딸과 마지막 인사를 하기로 했다.

정씨는 희생자들의 시신발굴작업을 하고 있는 백화점 잔해속에 하얀 국화를 한송이 한송이 던지면서 『혜원이와 함께 이번 사고로 참변을 당한 사람들 모두가 저승에서는 행복하기를 빈다』는 말을 남기고 쓸쓸히 백화점을 떠났다.<이상연 기자>

◎1분이 가른 “유학의 꿈”/현대학원 이사장 딸 김주은양/엄마와 함께 백화점 들어서자 “꽝”/삐삐엔 “저 내일 떠납니다” 메시지

『양념과 밑반찬만 사면 돼요. 엄마하고 함께 빨리 다녀올게요』

김현곤(54·서초구 방배동) 현대학원이사장이 큰딸 주은(21·연세대 노문3)양으로부터 전화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내일 떠날 놈이 여태 준비를 다 안했냐』고 가벼운 핀잔을 준 것조차 김이사장에겐 못내 후회스럽다. 주은양은 사고직전인 하오 5시30분께 어머니 백은현(51)씨와 함께 집을 나서 삼풍백화점으로 갔다. 백화점 지하에 차를 세우고 정문으로 들어가다 동생의 담임선생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모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불과 1분정도 지났을때 백화점은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주은양은 사고 다음날인 30일 러시아로 유학갈 예정이었다. 93년 장학생으로 연세대 노문과에 진학한 뒤 이번 방학부터 교환학생으로 8개월간 모스크바대에서 연수를 받기로 돼있었기 때문이다. 모녀가 백화점에 간 것도 주은양이 갖고 갈 밑반찬류를 사기 위해서였다. 평소 동네시장을 이용하던 알뜰모녀지만 이날은 8개월의 유학에 앞서 모처럼 백화점에 갔다가 변을 당했다.

『시신이라도 찾았으면 좋겠지만 아직도 지하 어딘가에서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아요』 김이사장은 아들과 함께 며칠째 현장과 병원, 대책본부를 헤집고 다니며 부인과 딸을 찾고 있다.

주은양이 지니고 있을 무선호출기 번호를 누르면 『안녕하세요 주은이에요. 저는 30일 러시아로 떠납니다. 그동안 한국을 잘 지켜주시고 메시지 많이 남겨주세요』라는 음성녹음이 흘러나오고 있다. 마치 천국에서 보내오는 메시지처럼 들린다.<염영남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