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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혁명사상가 노신고향 소흥(중국리포트: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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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혁명사상가 노신고향 소흥(중국리포트:10­3)

입력
1995.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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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문필가배출 유서깊은 고도/생가는 중요문화재 지정… 옆엔 기념관중국의 문필가이자 혁명사상가인 뤄신(노신)의 고향은 저장(절강)성의 성도이자 서호로 유명한 항저우(항주)에서 동남쪽으로 70 떨어진 사오싱(소흥)이다. 물의 도시로 유명한 사오싱은 많은 문필가와 인물을 배출한 유서깊은 고도이다.

뤄신은 이곳에서 1881년에 태어나 18세때까지 주요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일본유학을 거쳐 다시 고향에 돌아와 1909년부터 6년간 교편을 잡았다. 뤄신은 생애55년간의 3분의1정도를 사오싱에서 보낸 셈이다. 그의 원래이름은 주수인이었고 뤄신은 그의 어머니성인 뤄씨에서 따온 필명이다. 뤄신의 집안은 조부가 청나라때 베이징(북경)에서 벼슬을 한 명문세가였으나 아버지가 병약해 그의 성장기에 이르러서는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뤄신은 우리에게도 잘알려진 「아Q정전」과 「광인일기」등을 통해 봉건사회의 모순과 도탄에 빠진 중국인민들의 참담한 현실을 통렬하게 고발했다. 그러면서 그자신도 이같은 사회적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좌익혁명 노선쪽에 기울었다.

사오싱의 뤄신생가는 중국정부에 의해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원형보존돼 있고 생가 바로 옆에는 그의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뤄신이 다녔다는 서당과 젊은시절 중국봉건사회의 모순에 고뇌했던 찻집등도 그대로 남아 찾는 이들을 맞고 있다.

뤄신의 생가는 뤄신이 공부를 했던 공부방에 책상과 서가가 그대로 남아있고 침실및 집안의 정원과 당시 사용했던 가재도구들이 원형보존돼 있다. 그의 집은 모두 네개의 문을 통해야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1천평이상의 규모이고 집안에는 백화초원이라 이름붙은 1백여평 남짓한 텃밭이 있다.

생가바로옆에 마련된 기념관에는 뤄신의 활동상이 연대별로 기록돼 있다. 그가 친교를 나누었던 인사들과의 기념사진및 친필원고등이 보관돼 있는데 뤄신은 특히 성이 같아서인지 저우언라이(주은래) 총리와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뤄신은 생애마지막 10여년을 보냈던 상하이(상해)시절 공산혁명가들과 광범위한 친분을 맺었고 이 친분이 바로 중국공산당이 그를 위대한 혁명문필가로 평가하게 되는 근원이 된다.

중국당국의 뤄신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중국사람들의 그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은 대단하다. 안내를 맡은 사오싱시 외사판공실 부주임 왕샤오준(왕소군·35)은 『뤄신이야말로 인민과 고뇌를 함께한 지식인』이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중국인민들은 자기들의 어려움과 고초를 피부로 같이한 지식으로 그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뤄신은 34세 때 고향을 떠나 베이징과 광저우(광주)등에서 급진적인 지식인들과 교우를 한뒤 55세에 폐암으로 죽을 때까지 10년간 상하이에서 살았다.

뤄신의 묘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우리귀에도 익은 상하이 홍꾸(홍구)공원에 있으며 공원이름도 그를 기념해 뤄신공원으로 바뀌었다.<사오싱=이병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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