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외교로 아랍권 새강자 부상/불만느낀 회교과격파 소행 추정호스니 무바라크(67) 이집트 대통령은 26일 에티오피아 방문중 총알세례를 받고도 살아 남았다. 81년 군사퍼레이드 사열도중 암살된 전임자 안와르 사다트의 비극이 재현되는 것은 일단 피한 셈이다. 이번 암살기도는 81년과 마찬가지로 이집트를 회교공화국으로 만들려는 회교 과격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됐을 것이란 추측이 강하다.
회교과격파를 공적1호로 지목한 무바라크의 강경노선과 그에 대한 과격파들의 무차별 테러를 상기할 때 의심의 눈길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낫세르와 같은 카리스마도 없고, 사다트처럼 화려한 정치업적도 쌓지 못한 무바라크는 81년 집권뒤 경제발전과 국가안정을 내치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같은 양대과제를 성취하는데있어 회교 원리주의자들은 최대의 장애였다. 이들의 준동과 정부의 탄압이 악순환되면서 주수입원인 관광산업은 침체를 면치 못했고 외국 투자가들의 발길도 뜸해졌다. 이런 와중에서 90년 국회의장이 암살되는가 하면 92년엔 과격파들의 무장폭동이 일어나 7백50명 이상이 숨지는 유혈사태까지 빚어졌다.
회교 원리주의자들과의 대화를 촉구하는 미국등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무골인 무바라크는 철권으로 대응했고 회교원리주의자들은 테러와 암살로 반발했다. 회교 과격파들은 93년 무바라크의 방미때와 지난해의 리비아 방문때등 이번 암살시도에 앞서 최소한 2차례 무바라크 암살을 기도했다.
수차례나 암살위협을 겪었지만 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상당히 높다. 그 지지는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가 집권초기부터 내세운 내치에서의 업적 때문이 아니라 외치의 성과 때문이었다. 이집트 국민들은 이집트를 중동의 맹주로 키워낸 무바라크의 외교치적에 박수를 보냈고 93년 96%라는 높은 지지율로 무바라크가 3번째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줬다.
무바라크는 냉철한 현실주의 외교 노선을 채택, 78년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캠프 데이비드 협정) 체결로 소원해진 아랍 형제국과의 유대를 회복하고 걸프전땐 아랍연합군 창설을 주도함으로써 이집트를 아랍권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시켰다. 그는 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평화협상을 중재하고 리비아와 서방의 갈등을 완화시키는등 중동의 조정자로서 맹활약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집트는 회교 과격파들때문에 사실상 국가비상사태속에 있다. 73년 4차 중동전때 공군참모총장으로서 초반 기습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국민적 영웅이 되었던 무바라크가 적진을 폭격하듯 회교 과격파들을 진압,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윤순환 기자>윤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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