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뜨겁게 보고 차갑게 찍자/오세훈 변호사(선택의 길목에서)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뜨겁게 보고 차갑게 찍자/오세훈 변호사(선택의 길목에서)

입력
1995.06.25 00:00
0 0

◎믿을 것은 역시 성숙하고 매서운 시민의식뿐인신공격, 흑색선전, 과열, 혼탁….

연일 보도되는 선거관련기사를 보며 유세장을 찾으면 아수라장 같을 것으로 지레 짐작했었다. 달변가들의 격앙된 연설과 높은 톤의 상호비난을 직접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도 했었다.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서울과 인접한 중소도시. 쾌적하고 살기 좋다고 소문난 아담한 도시. 이곳에서의 시장후보 합동연설회는 한마디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곳의 시장후보는 민자 민주 자민련후보와 무소속후보 3명등 모두 6명이었다.

특이한 것은 후보들이 대체적으로 눌변이라는 사실이었다. 직업공무원, 정치인, 시민운동가인 동시에 치과원장, 시의원, 도의원등 다채로운 경력의 후보자들이 하는 연설실력은 전반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지만 모두 진솔함에서는 수준급이었다. 이러한 연설이 오히려 신뢰감을 줄 수 있다는 느낌도 피부에 와 닿았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상호비방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행정경력이 꼭 필요하다거나 구태의연한 행정경력은 오히려 짐이 된다거나 하는 식의 원론적 자기주장이 없지 않았지만 특정후보의 경력이나 인물됨됨이를 문제삼는 공격적 내용은 일체 없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상대방 후보에 대한 칭찬이 간간이 들어 있어서 청중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정도였다. 마지막에 등단하여 자신을 안기부 간부출신이라고 소개한 어느 후보자는 아예 자신의 부족한 점을 스스로 밝히고 다른 후보들의 장점을 하나씩 열거하여 폭소가 터지곤 했다. 혹시 이번 선거보다도 내년의 국회의원선거를 겨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로 대단한 선거전략이 아닐 수 없다.

또 한가지 예상을 뛰어넘는 장면은 동원된 자원봉사자들의 태도였다.

보통 매스컴을 통해서 알고있던 상식으로는 자신의 후보가 연설을 끝내면 그 후보와 같이 우르르 자리를 떠나버려서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든다는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맨 처음 연설한 후보자의 연설이 끝나자 같은 색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 『역시 그렇지』하고 있는데 그 다음 후보부터는 지지자들과 함께 모두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었다. 각 후보가 자원봉사자들에게 똑같은 옷을 입혀 놓아서 옷만 보아도 누가 누구의 선거운동원인지 금방 알아 볼 수 있는데, 이분들의 양식있는 행동이 유권자들을 계속 감격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수준높은 시민들의 취향에 맞추기 위한 선거전략의 일환일 것이라고 추측되기는 하지만, 다른 후보자의 연설에도 귀기울여 주고 뒤에서 조용히 휴지와 담배꽁초를 줍는 자원봉사자를 보고 『저 옷이 어느 후보 옷이지』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 참으로 좋은 시간이었다. 이 도시는 시민들의 교육수준과 시민의식이 높기로 정평이 나있다. 이런 시민들에게 호감을 주려면 세련된 선거운동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 지역감정이나 부추기고 중앙정치무대의 아무개와 가깝다는 것을 과시해 보아야 오히려 감표요인이 될 수 밖에 없을 테니, 자연히 신선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선거기법이 창출되고 선호될 수 밖에….

몇몇 욕심에 눈이 흐려진 사람들만 사라져 주고 지방자치가 제대로 자리 잡으면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정치문화가 우뚝 설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서 흐뭇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오는데 라디오를 트니 마침 뉴스시간이었다.

『이번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중 전과자가 OO명인 것으로 판명…, 그중엔 사기, 강간등 파렴치범도 OO명…』『○○○후보가 ×××후보의 …전력을 문제삼자 ×××후보도 맞불작전을 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맥이 쭉 빠졌다. 역시 믿을 것은 「시민의식, 성숙하고 매서운 시민의식」뿐일 것이다. 뜨겁게 바라보고 차갑게 투표합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